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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비전] 사는 건 그런 거지,<인생>
이다혜 2003-10-23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을 논한 이들이 꽤 많았던 것 같지만, 인생은 나그네길이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떠돌다 가는 길이라던 노랫말이 의미 있게 떠오를 뿐이다. 단편 애니메이션 <인생>은 우리네의 ‘떠돌다 가는 길’을 수직적인 구도로 변형시켜 그려낸 작품이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지고 오르고 올라서 이윽고 도달하는 곳. 그곳은 어떤 거창한 것이 기다리고 있는 이상향이 아니라, 또다시 과정으로 이어지는 연속일 뿐이다.

김준기 감독의 3D애니메이션 <인생>은 9분50초 동안 대사 하나없이 펼쳐지면서, 삶의 은유로서 조용히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든다. 지난 6월 완성된 이 작품은 따끈따끈한 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수상 소식을 전해오고 있다. 2003 SicAF에서 단편애니메이션 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이탈리아 마티타필름페스티벌에서 관객상, 미쟝센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것이다. 3D 영상은 부자연스럽고 차가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오히려 따스한 느낌을 주는 게 김준기 감독의 장점이다. 그가 <인생>의 수직적인 구도 안에서 순환을 그려내는 내공은 만만치 않다.

맨 처음 보이는 것은 어떤 남자의 커다란 뒤통수다. 힘들게 어딘가 올라가고 있는지 들썩이는 그의 뒷모습에서 이윽고 무언가 보인다. 아기다. 그의 등에 업혀 있는 건 해맑게 웃고 있는 아기였다. 아기를 업고 그가 올라가고 있는 곳은 잉카시대를 떠오르게 하는 기둥. 어디쯤인지는 모른다. 그저 신비한 문양이 있는 기둥과 푸르디 푸른 하늘만이 보일 뿐이다. 얼마쯤 갔을까, 그가 잡았던 돌이 무너지면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한다. 아찔하다. 겨우 위기를 모면한 남자는 기둥 난간에 앉아 아기에게 밥을 먹이고 피리를 연주해준다. 아기의 해맑은 웃음에 남자도 함께 웃는다.

어느새 아기는 소년으로 자라 남자의 뒤를 따라 기둥을 오르고 있다. 비바람도 불고 눈보라도 치지만 둘은 묵묵히 갈 길을 갈 뿐이다. 시간은 또 흘러 소년은 청년이 됐고 남자는 늙었다. 기둥 틈에 피어 있는 열매조차 따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이 힘겹다. 힘에 넘치는 청년이 노인에게 열매를 따준다. 노인은 대견하게 그를 바라보며, 가져온 씨앗을 다른 자리에 뿌려둔다. 누군가 뿌린 씨앗이 열매가 되어 그들의 식량이 되었던 것처럼.

얼마쯤 갔을까. 이미 앞장서고 있는 건 청년이다. 할아버지가 되어 더이상 올라갈 수 없게 된 남자를 남겨두고, 청년은 자기 갈 길을 간다. 이별이다. 남겨진 남자는 자신이 마실 마지막 물을 옆에 있는 나무에 주고 죽는다. 청년은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 그곳에서 그가 한 일은….

김준기 감독은 작품 제작 동기를 묻는 말에 “그냥 옛날부터 마음속에 있었던 것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답한다. 거창한 말 한마디쯤 붙여도 좋으련만,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그를 움직이는 건 관념이 아니라 그저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1년8개월 걸려 혼자 만들어낸 <인생>은 전작 <등대지기>에 비해 많은 기술적인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적인 주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변함없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내년에 완성될 차기작 에서도 이어질 예정이다. <The Room>에서 그는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실험체들을 통해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한다. <인생>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영상자료실에서 볼 수 있다.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