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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블레어 윗치>인가? 멜 깁슨 감독의 <수난>
이다혜 2003-10-23

멜 깁슨 감독의 <수난>, 불법 예고편에 이어 팬사이트도 여러개 ‘e소문’ 활활

1990년대 초반 파졸리니라는 이름은 영화마니아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대표적인 기준이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살로, 소돔의 120일>을 어렵사리 보고나서는, ‘봤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더 많은 파졸리니 영화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이른바 마니아들의 일반적인 특성이었던 것. 그즈음 파졸리니의 <마태복음>을 봤다면, 십중팔구는 그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서였을 것이라고 보면 될 정도다. 성경의 마태복음 자체에도 별다른 사전지식이 없었던 필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살로…>에서와 같이 파격적으로 그려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마태복음>을 본 경우다. 당시엔 국내에서 상영 자체가 불투명했던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보다 훨씬 더 논쟁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 흥분까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된 지 채 몇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천천히 감기는 눈을 애써 부릅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뒤 무려 1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다룬 또 한편의 ‘독특한’ 영화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 영화의 제목은 <수난>(The Passion). 이 영화는 멜 깁슨이 <브레이브 하트>에 이어 10여년 만에 감독을 맡은데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마지막 12시간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낼 것이라는 점 때문에 제작 초기부터 많은 주목을 끌었던 영화다. 하지만 제작 막바지 단계에 와서는 영화가 대중을 상대로 상영되기에는 너무 잔혹하며 라틴, 히브루 그리고 아라마익 등 고대 언어로만 되어 있는 대사에 자막을 넣지 않을 계획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반명예훼손연맹(ADL)이라는 단체가 편집이 채 끝나지도 않은 필름을 보고 ‘반유대인 정서를 부추길 위험이 있다’고 발표한 반면 바티칸의 한 추기경은 ‘예술과 믿음의 승리’라며 오히려 극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영화에 전세계인의 관심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화제가 되기 이전부터 네티즌들이 이 영화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고, 그 자체가 뉴스거리가 될 정도였다는 점이다. 그 시작은 지난 7월 대표적인 비공식 영화정보 및 평가 사이트인 ‘Ain’t it cool news’에 이 영화의 예고편이 올라오면서부터였다. 비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입수된 예고편은 정상적인 예고편이 아니라 제작사인 아이콘 필름스 내부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예고편이 사이트에 올라오자마자 엄청난 수의 네티즌들이 접속을 시도해 전체 사이트의 속도가 늦어지는 문제점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 사이트의 운영자인 해리 놀즈에 따르면, 어떤 날은 무려 35만명이 다운로드를 받아보았을 정도. 결국 그 ‘불법’ 예고편은 사이트에서 삭제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몇몇 기독교 관련 웹사이트들과 영화 관련 사이트들이 다시 예고편을 게시했기 때문. 그중 하나인 ‘TheMobieBox.net’ 역시 <CNN> 등 몇몇 대형 사이트에서 링크를 걸 정도로 큰 관심을 끌어, 결국 서버가 폭주하는 경험을 해야 했다.

잔혹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수난>의 한 장면.

제작현장의 멜 깁슨.

영화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The Dolorous Passion of Our Lord Jesus Christ>

비슷한 현상은 향후 개봉될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Yahoo!’의 ‘Upcoming Movies’ 코너에 올라온 내년 초 개봉이 예상되는 영화들 중에서 <수난>이 가장 많은 방문자를 끌어모으고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공식 홈페이지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현 시점에서 벌써 몇개의 팬사이트가 만들어진 점도 네티즌들의 관심이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준다. 그와 비교해보면 크리스마스 시즌 즈음 공식 예고편과 홈페이지가 공개될 것이라고 밝히는 제작사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아무 생각없어 보이는 제작사의 모습을 다르게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제작사인 아이콘 필름스가 비상업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수난>을 어떻게든 상업적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조장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이른바 ‘제2의 <블레어 윗치>’가 되려 한다는 것. 물론 아이콘 필름스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전반적인 상황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는 반응이다.

문제는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 되었든 혹은 일부 조작이 연루되어 있든 영화에 대한 많은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수난>이 개봉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제작사와 멜 깁슨은 내년 2월25일을 개봉예정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아직까지 미국 내 배급사를 잡지 못했기 때문. <예수의 마지막 유혹>을 배급하려다 유니버설스튜디오가 엄청난 피해를 봤던 사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메이저 배급사들이, 배급권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이콘 픽처스와 ‘First look’ 계약을 맺은 폭스조차 이 영화의 배급권을 이미 공식적으로 포기한 것. 다행히 <메멘토>를 배급해 큰 성공을 거두었던 뉴마켓이라는 소형 배급사가 공식적으로 배급 의향을 밝혔으나, 과연 계약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따라서 이 영화가 가지고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이야기와 표현에서의 파격에 대해 조금이라도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면, 향후 이 영화의 배급을 둘러싸고 벌어질 일련의 상황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어쩌면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자발적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네티즌 서포터들의 활동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는, 색다른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수난> 팬사이트 : http://www.passion-movie.com

<수난> 비공식 홈페이지 : http://www.sassiweb.it/thepa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