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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신문 제23호 1956~1957
심은하 2003-10-27

영화사신문 제23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김재희

1956 ~ 1957

할리우드 ‘TV미학’ 바람

TV연출자들 잇따라 감독 데뷔, 클로즈업과 대사 중심의 드라마기법 도입

TV에서 작품 경력을 시작한 신예감독들이 할리우드에 등장하며 전통적 영화문법을 바꿔놓고 있다. 이들은 무성영화나 발성영화에서 출발한 원로감독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과감한 클로즈업 등을 구사하며 ‘TV미학’을 영화에 도입하고 있다.

1956년 <낯선 젊은이들>(The Young Stranger)을 연출한 존 프랑켄하이머, 1957년 의 시드니 루멧, 역시 1957년 <도시의 변두리>를 연출한 마틴 리트. 세명의 신인감독들은 모두 TV드라마를 연출했던 이들이다. 애초 공군 영화부에서 기록영화를 만들었던 프랑켄하이머는 1953년 이후 수많은 TV드라마를 연출해왔다. 루멧의 경우 은 에서 일할 때 만든 자신의 대표작 TV드라마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들 TV 출신 감독들의 영화는 몇 가지 공통적인 미학을 갖고 있다고 영화평론가들은 지적한다. 56∼57년에 나온 이들의 영화들은 우선 전경, 중경, 후경 영상이 모두 뚜렷한 초점으로 나타나는 딥 포커스(deep focus)를 강조하고 있다. 또 클로즈업을 지나칠 정도로 적극 이용하는 방법으로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고 있다. 평론가들은 “마치 TV드라마처럼 대사 중심의 각본을 사용하는 것도 이들 감독들의 공통된 성향”이라고 지적한다.

이들 세 감독 외에 TV코미디와 쇼 프로로 인기 높은 아서 펜(나중에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통해 대표적 뉴시네마 감독으로 꼽힘- 편집자)이 1958년 개봉을 목표로 <왼손잡이 건맨>을 준비하고 있는 등 TV 출신들의 영화 진출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TV의 등장으로 50년대 들어 위기국면에 들어선 영화산업은 와이드스크린과 자기녹음방식으로 TV와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TV 출신 신인감독들을 통해 TV 특유의 미학적 스타일을 영화 안으로 끌어안는 방법으로 젊은 관객을 유혹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 자동차극장 춘추시대

극장 수 6천개 돌파, 전체 박스오피스 수입의 1/4 수준

미국 내 자동차극장(Drive-in theater)이 1957년 들어 6천개를 넘어서며 전성기를 예감하고 있다. 영화 전문가들은 “앞으로 2년 이내에 미국 내 자동차극장 수가 1만개를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 내 첫 자동차극장이 만들어진 것은 지난 1933년. 그러나 10년이 넘은 지난 1945년, 전체 자동차극장 수는 20개 정도로 자동차극장의 인기는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50년대 이후 TV의 등장 등으로 전통적 극장을 통한 박스오피스 수입이 떨어지면서 극장주들에게 새로운 사업 모델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극장은 이미 1950년에 1천개를 넘어서더니 52년 3천개, 54년 4천개를 넘어섰다. 미국 영화계는 이처럼 자동차극장이 늘면서 50년대 초반 이후 자동차극장 수입이 전체 박스오피스 수입의 약 1/4 수준으로까지 올라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0년대 들어 자동차극장들은 그 규모와 함께 서비스를 대폭 확장했다. 많은 극장들이 자동차극장 입구를 영화가 시작되기 3시간 전부터 개방했다. 관람객이 아이들을 영화시작 전 아무 때나 데려올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프라이드치킨, 햄버거, 피자 등 저녁거리를 늘리고 차 안에서 주문할 수 있도록 했다. 또 50년대 이후 2천∼3천대의 자동차를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극장이 생겨난 것도 자동차극장의 수요를 늘리는 데 큰 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그리고 주로 10대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들을 상영해 청소년들이 자동차극장을 ‘열정의 장소’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도 자동차극장의 인기를 높이는 주효한 요인이었다.

소련 영화계 ‘기지개’

스탈린 비판 이후 10편 미만이던 제작편수도 92편까지 증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지 4년이 지난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 국제정치 영역 외에 소련 영화계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집권 시기 개인 숭배의 주요한 장치로서 영화를 언급하며, 그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또 스탈린의 정치·군사적 입장을 찬양하는 영화들을 공격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소비에트의 필름보관소 직원들은 1930년대 고전들에 등장하는 ‘지도자’의 얼굴들을 지워 ‘수정판’을 만드는 작업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컨대 스탈린이 나온 숏들을 잘라내고, 그의 이름이 언급된 부분의 음성을 다시 입히는 것이다. ‘스탈린 비판’ 직후 각 지역의 사무실, 공장, 가정 내에서 ‘지도자 초상’이 일제히 제거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는 분석이다.

‘비판’ 이후 터져나온 강력한 조치 이전부터, 소련 영화계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미 전기영화, 기록영화와 냉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사라지고 코미디와 뮤지컬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또 스탈린 사후 전쟁영화들은 과거 전쟁영화들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예로 그리고리 추크라이의 <마흔한번째>(1956)는 한 여자 군인과 죄수 사이의 성적관계의 발전을 묘사했다. 미하일 칼라토조프 감독의 <학이 날아가고>(1957)의 여주인공 역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시기의 ‘긍정적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약혼자가 전선에 나가 있는 동안 약혼자의 형과 정사를 갖고 죄의식으로 고통받는다. 40년대 후반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받았던 심리적 갈등 묘사가 이 영화를 통해 공식적인 인가를 받은 것으로 평론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스탈린 사후의 그 같은 해빙 무드 탓인지 1940년대 말 10여편에 머물다 51년 9편으로 줄어든 소련의 영화 제작편수는 1957년 92편까지 치솟았다는 통계다.

폴란드 ‘젊은 피’ 수혈

젊은 감독 대거 등장, 안제이 바이다의 <카날> 등 개성있는 작품 선보여

2차 세계대전 동안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던 폴란드 영화계가 살아나고 있다. 독일군에 의해 기자재는 파손되고, 감독들은 런던이나 뉴욕으로 망명을 떠나는 등 폴란드 영화계는 암흑천지를 헤매고 있었다. 1945년 종전 이후, 영화산업은 국유화되었고 그나마 만들어진 몇 안 되는 영화들은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독창성이 부족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폴란드 영화계에 심대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젊은 감독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이들은 의무제작으로 인해 빛을 잃어온 자신들의 창작물에 개성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 대표주자가 안제이 바이다로, 그는 3년 전에 연출한 <세대>(A Generation)라는 영화에서 전쟁에 대한 반감과 증오를 씁쓸하면서도 냉정하게 묘사했다. 이제 그는 1944년의 바르샤바 혁명 영웅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두 번째 작품 <카날>(Kanal, 1957)을 만들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당시 기병부대 장교였던 아버지를 잃은 바이다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가입한 경험이 있다. 그 탓인지 폐소공포증적이면서 우울한 이 영화의 대부분의 사건들은 게릴라들이 숨곤 했던 도시의 하수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용맹과 비겁함, 신의와 배신이 교차되는 이 지하세계에서 종종 하수구는 그대로 무덤이 되기도 한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Inferno)을 비정하게 상징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주제의식과 이미지로 폴란드 영화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전세계 언론은 평가하고 있다.

“아내를 그렇게 벗겨야 했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 바댕 감독 도덕성 비난,

논란 아랑곳 부인이자 주연여우 브리지트 바르도 스타덤

1956년 말 프랑스 파리에서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And God Created Woman)가 개봉되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 브리지트 바르도가 일약 세계적 스타로 떠올랐다. 그리고 몇 가지 논란을 낳았다.

이전 10여편의 영화에서 조연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여주인공 브리지트 바르도. 그녀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과감한 노출과 에로티시즘은 당시로선 분명히 논란의 대상이 될 정도다. 그러나 ‘야한 장면’ 외에 이 영화의 감독 로제 바댕이 브리지트 바르도의 남편이란 사실이 논란을 증폭시켰다. 두 사람은 바댕이 조감독이던 52년 처음 만났다. 논란의 핵심은 “영화라고 하지만 어떻게 아내를 그런 식으로 등장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댕은 아내의 노출과 관련해 “욕심 같아서는 더 많이 가려고 했는데, 검열 때문에 많은 장면을 잘라내야 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바댕은 이어지는 비난에 “브리지트는 워낙 위선을 싫어했고, 누드장면을 사랑했다”고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또 “브리지트는 지극히 이 시대의 전형적 여성이며, 사회가 부과한 온갖 터부로부터 자유로운 여자”라고 받아쳤다.

도덕성에 관한 논란이 가열되자 영화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는 ‘B. B(브리지트의 약칭)는 음모의 희생자’란 제목의 글을 통해 이 영화의 작품성을 옹호하고 나서기도 했다. 브리지트 바르도의 요부(妖婦) 이미지와 별도로 영화는 시네마스코프와 컬러영화의 매력을 한껏 드러낸 의미있는 영화라는 주장이었다.

이 영화는 이듬해인 1957년 미국에서도 개봉돼 브리지트 바르도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놓았다.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영면

유명한 감독이자 작가, 배우인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이 1957년 5월12일 파리 근교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1885년 비엔나의 유대계 모자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09년 미국으로 이민 와 1914년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배우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데뷔작 <눈먼 남편들>(Blind Husbands, 1919)로부터 <여왕 켈리>(Queen Kelly, 1928)까지 그는 단숨에 무성영화계의 손꼽히는 감독으로 부상했다. 유성영화 시기엔 그는 배우로서 더 잘 알려졌는데, <선셋대로>(Sunset Boulevard, 1950)와 같은 영화에서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무성영화계 스타의 전남편이자 감독으로 나와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죽기 두달 전, 프랑스 명예훈장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단 신 들

험프리 보가트, 식도암으로 사망

도회지의 비정하고 음영이 짙은 역을 도맡아 미국생활의 냉혹한 단면을 개성있게 보여준 험프리 보가트가 1957년 1월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무대 배우에서 출발하여 1930년 영화계로 진출한 그는 히트작 <말타의 매>(1941), <카사블랑카>(1942), <아프리카의 여왕>(1951)을 비롯, 81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51년 <아프리카의 여왕>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사브리나>(1954), <신의 왼쪽 팔>(1955) 등 많은 히트작에 출연한 그는 그러나 평생의 벗인 흡연과 음주로 병을 얻어 1957년 그의 빛나는 경력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유족으로는 여배우인 아내 로렌 바콜과 1남1녀가 있다.

록의 황제 엘비스 배우되다

로큰롤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십세기 폭스의 1956년작 <러브 미 텐더>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서부영화인 이 영화에서 엘비스는 터프 가이로 나와 네빌 브랜드가 쏜 총에 맞아죽지만, 막판에 유령으로 다시 나타나,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기타를 튕기며 영화의 타이틀 송을 부른다.

스탠리 큐브릭, 반전 메시지 <영광의 길> 완성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의 신작 <영광의 길>(Paths of Glory)이 운좋게도 한국전 직후에 완성됐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6년 프랑스의 한 부대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건의 요지는 군의 공격명령에 불복한 부하들에 분격한 장군이 이들을 처형할 것을 대위에게 명했으나, 대위 역시 이러한 장군의 명령에 불복해 결국 장군이 무작위로 세명의 군인을 추출해 처형했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이 몰고 올 파장을 우려해 함구령을 내릴 정도였다. 상부의 공격명령에 연쇄적으로 불응하여 결국 무작위 처형됐다는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담은 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한 반전영화는 이미 유럽의 몇몇 국가와 미군 내 극장에서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다.

인도 “아프리카 이미지 실추” 상영금지

인도 정부는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안 좋게 묘사함으로써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미국영화 여섯 작품과 영국영화 두 작품에 대해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다. 지난해(1955)에 개봉한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작품인 <탄가니카>(Tanganyika)에 대해 아프리카 출신 학생들이 데모한 이후, 네루 총리는 아프리카를 “백인이 져야 할 짐” 정도로 묘사한 영화들에 대해 검열당국은 상영금지하라고 비공식적인 권고를 했다. <아프리카의 여왕>(The African Queen, 1951)과 <모감보>(Mogambo, 1953)가 상영금지 조치를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