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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엄마 딸 맞아?
2001-01-06

<비밀>에서 <엄마야 누나야>까지, ‘출생의 비밀’이 어필하는 이유

올해가 <허준>의 해였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다. 궁중의 암투를 그린 대하 서사물에서 벗어나 한 인물의 개인사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허준>은 상반기 방송가의 가장 큰 화제였다. 하지만 <허준>의 독주를 제외한다면 올해 드라마 시장은 ‘출생의 비밀’이 뒤흔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출생의 비밀’이야 늘 드라마의 단골메뉴지만 올해만큼 집중적으로 제작돼 폭발적인 인기를 끈 해도 없었던 것 같다. SBS <줄리엣의 남자>와 맞붙었던 MBC 미니시리즈 <비밀>이나,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KBS 미니시리즈 <가을동화> 등이 30%에서 50%가 넘는 시청률로 인기를 끌었고 현재 방영중인 MBC 주말드라마 <엄마야 누나야>의 경우 회가 거듭될수록 탄력을 받아 지난주에는 28%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단순히 제작편수를 떠나 자칫 식상하게 마련인 이런 소재가 시청자들에게 계속 소구될 수 있는 이유는 무얼까? 왜 우리는 출생의 비밀에 연연하는가.

중제: 가족의 비극에서 개인의 비극으로

<사랑과 진실>로 대표되는 80년대 안방드라마를 돌이켜보면 그때도 문제는 ‘출생’이었다.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좀더 개인적으로 접근하던 당시에는 주인공이 누구의 아들이냐 딸이냐, 알고보니 주워온 아이였더라 하는 것은, 마치 전 국민이 아는 친척이라도 된 양 관심의 초점이 되었고 당시 이런 드라마들의 시청률과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렇듯 출생의 비밀은 어디에 써먹어도 ‘잘 먹히는’ 소재로 오랫동안 드라마에 애용돼왔다. 하지만 90년대 초반 <질투>로 시작된 트렌디드라마의 유행은 출생 신드롬을 잠시 잠재웠다. 젊은 남녀의 일과 사랑, 혹은 배신. 전문직종에 종사하며 오피스텔 같은 개인공간에서 살아가는 트렌디드라마에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가족의 부재였다. 가족이라는 구조가 배제된 상태에서 출생은 더이상 드라마틱한 소재로 쓰일 틈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반복적으로 클론들만 복제해내던 일본식 트렌디드라마가 대중의 미감을 계속 자극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탄생된 것이 한국형 트렌디드라마다. 이는 젊은이들의 도시적 사랑에 그간 도외시됐던 가족구조를 첨가하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가족이라는 공간의 복원은 다시 출생을 둘러싼 미스터리나 비극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듯 2000년에 선보인 출생의 비밀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80년대의 그것과 같고 또 다르다.

중제: 진부한 소재? 요리하기 나름이에요

올 가을 선보인 <비밀>은 운명이 뒤바뀐 두 자매라는 기본설정 위에 한 여자가 어떻게 파멸해 나가는지에 초점을 맞춰 긴장감 있는 전개를 보여주었고 <가을동화>는 뒤바뀐 출생으로 사랑마저 꼬여버린 네 남녀의 ‘사랑’을 선두에 놓고 나아간다. 방영중인 <엄마야 누나야>는 대리모에게서 태어나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던 쌍둥이가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이런 드라마들은 과거 단순히 ‘핏줄’ 문제로 시끄러운 가족풍경 대신 엇갈린 탄생을 어떻게 다른 운명으로 만들어 가는가에 관심이 있다. 20년의 세월은 문제해결의 주체를 가족 공동운명체에서 개인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KBS <태양은 가득히>의 가흔처럼 별로 효과적이지 못한 장치로 ‘출생의 비밀’을 낭비한 사례도 있지만 요사이 선보이는 드라마들은 출생의 문제를 드라마를 이루는 기본 골격으로만 취하고 초점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어떻게 사랑해 나가는가에 맞춘다. <엄마야 누나야>의 이관희 PD는 “남아선호사상의 결과가 잉태할 수밖에 없는 현실.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인공수정하고 시험관 아기가 탄생하는 과학문명의 결과물로 태어난 아이들을 다뤄보고 싶었던 거다. 그저 ‘출생의 비밀형 드라마’식으로 도매급으로 치부되는 것은 억울하다”고 말한다.

사실 ‘출생의 비밀’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소재임에 틀림없다. 어디엔가 있을 또다른 내 운명. 이는 불만족스런 현실을 또다른 출생으로 단박에 뒤집을 수 있다는 짜릿한 대리만족을 제시한다. 또한 생부나 생모, 즉 출생의 비밀을 파헤쳐나가는 복잡하고 미스터리한 전개는 그저 사랑이야기에 그치기 쉬운 단선적인 드라마구조에 수사물에서나 볼 법한 극적 반전이나 스릴을 얹는다. 게다가 핏줄이 중시되는 유교적인 한국사회에서 아이가 뒤바뀌는 사건이나 이복남매, 혹은 사촌간에 피어난 사랑은 별다른 장치없이도 충분히 비극적 분위기로 극을 이끌 수 있다. 일부 에서 마치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식의 비판을 하지만 이는 ‘잘 먹히니까 만든다’는 제작 마인드보다 더 안일한 비판일 수 있다. 우려할 것은 ‘또 출생의 비밀인가’라기보다 그것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사회심리와 이 매력적 소재를 얼마만큼 현명하고 개성있게 다룰 것인가 하는 2000년대식 해석법인 것이다.

백은하 기자luci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