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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식 사랑과 한국식 우국충정,<굿바이 레닌>
권은주 2003-11-06

건달, 분단국가 국민으로서 <굿바이 레닌>을 생각하다

엄격한 유교 관습에 따라 장례를 치르는 상가에 갔을 때 내가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대목은 ‘곡’이다. ‘곡’은 상을 당한 후손들의 슬픔의 정도를 대외만방에 알려서 가문의 예의범절을 과시하기 위한 형식이다. 그런데, 나는 일정한 박자와 곡조에 실려 전달되는 규격화된 슬픔을 접하면 자꾸 웃음이 나온다. 지금 울고 있는 저이는 지속적으로 눈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어떤 슬픈 기억들을 동원하고 있을까? 슬픔은 개인적인 것이고, 그 표현양식도 개인적인 게 제격이다. 내가 가장 쉽게 감염되는 슬픔의 표현양식은 두 가지다. 죽은 자식을 끌어안은 어미의 오열과 누군가의 죽음과 맞닥뜨린 무심한 표정. 이 둘은 사뭇 달라 보이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몰입해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런데도 무심한 표정으로 슬픔을 삼키는 사람들은 종종 오해받는다. “지 아비가 죽었는데 저놈은 슬프지도 않는가 봐,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네.” 하지만 누가 알랴! 이 사람이 길을 가다가도 혼자서 눈물지으며 더 오래 더 나중까지 망자를 추억할지!

나는 규격화된 수다로 슬픔을 과장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 깊은 슬픔은 너무나 단순해서 말로 옮기기 난감하다. 누군가에 몰입했던 사람은 헤어질 때 단 하나의 마음의 풍경과 맞닥뜨린다. 보내고 싶지 않지만 보내야 하는 상황. 이때 그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굿바이 레닌>을 보면서, 나는 그게 ‘굿바이’란 걸 깨달았다. 기약도 없고 회한도 없이 흘려보내는 말 ‘굿바이’ 말이다. 이 영화에서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고하는 마지막 작별인사도 ‘굿바이’다. 하지만 아들의 ‘굿바이’는 아주 특이하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난 골수 공산당원인 어머니에게 8개월간 진행된 동독의 몰락을 감추기 위해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 그것이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작별인사다. 품절된 동독산 피클을 구하러 다니고, 동독이 번영을 구가하는 것처럼 가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들어 비디오로 틀어주고, 동네 사람들을 고용해 어머니를 다시 한번 확신시키고…. 아들의 기발한 거짓말은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점입가경이다. 감독은 아들의 사랑이 깊을수록 거짓말의 정도가 심해지도록 기발한 이야기 틀을 짜놓았다. 그래서 관객은 아들의 천일야화를 듣고 즐겁게 웃은 만큼 나중에 눈물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마지막에 어머니가 죽고 아들이 어릴 때 갖고 놀던 로켓에 어머니의 유골을 담아 하늘로 쏘아올릴 때쯤이면 객석은 웃음이 말끔히 가시고 숙연한 분위기가 된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깊은 슬픔을 간직한 자가 조금씩 그 슬픔을 보여주면서 더 오래까지 슬퍼하도록 만드는 화술을 구사하고 있다. 나도 그 화술에 깊이 감동받아서 극장을 나왔다.

내가 분단국가의 국민이 아니라면 이 영화에서 정서적 유용성만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제목부터가 모종의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야기 구조도 매우 정교하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위계를 가정한다. 모든 동독적인 것은 왜 웃음의 대상으로 전시되는가. 그것이 아무리 연민을 깔고 있다고 하더라도, 웃음은 우월한 체제에 기댄 자의 연민이 아닌가. 그리고, 왜, 아들의 사랑의 대상이 애인이 아니고 하필이면 어머니인가? 애인과의 결별은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는 사회적 현실이지만 어머니와의 결별은 언젠가는 겪게 될 성장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 아닌가. 말하자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레닌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그런 존재란 말 아닌가. 또, 왜 하필이면 어머니는 독일 통일에 때맞춰 죽고, 유골의 형태로 통일 독일을 기념하는 불꽃과 함께 한줌 재로 흩뿌려지는가. 통일 독일이란 새 역사를 위해 당신의 육신은 안타깝지만 사라져야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나는 이 영화의 정치적 전언이 아무래도 이런 거 같다. “잘 가요 레닌 아저씨, 그동안 애썼는데 이제 편히 쉬세요. 미래에 대한 약속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그것이 사랑 때문이었다는 거 저희는 알아요.” 사회주의의 이상은 받아들이겠지만 사회주의가 만들어놓은 현실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아들의 독일 사랑. 그래도 독일인의 사랑이 ‘처음부터 악의에 찬 새빨간 거짓말’로 역사의 패자가 된 사회주의에 냉전 비용을 전가하며 자본주의의 결점을 묻어버리려는 한국인의 우국충정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송두율 교수를 아버지로 캐스팅해서 한국에서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면 아마 이런 제목이 될 것이다. ‘깟뎀 레닌.’ 남재인/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