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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선택, 그리고 신념,<참을 수 없는 사랑>
권은주 2003-11-13

<참을 수 없는 사랑>을 본 아가씨, 연애사를 추억하다

용기있는 자만이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고 했던가. 스물여섯살 이후로 결혼을 통한 인생역전을 지치지 않고 꿈꿔왔던 나에게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용기없음으로 인해서 좌절한 아픈 사연이 있다. 내 인생의 주접 레퍼토리가 대체로 그렇듯 이번 사단도 친구이자 동료인 모양으로부터 시작됐다. 어느 날 취재를 다녀온 그녀는 눈알을 초롱초롱 빛내며 이야기를 꺼냈다. “드디어 완벽한 너의 짝을 찾았어.”

사연인즉 그가 만난 한 취재원이 수백억대의 재산가인 독신남이었던 것이다. 또한 나이도 많은데다 건강이 안 좋다는 통상적인 이상형 조건뿐 아니라, 가족과 절연하다시피해서 사후 재산분쟁이 일어날 확률이 지극히 희박하다, 성격이 너무 괴팍해서 주변에 다른 여자가 꼬일 가능성도 거의 없다 등등 플러스 옵션 정보를 친구는 선물처럼 내놓았다. 일이 성사되면 지분을 몇 대 몇으로 나누자는 둥 우리는 건설적인 대화를 한참 동안 나누었다. 그러나 친구의 집요한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인생역전의 기회를 놓고야 말았다. 치명적으로 나에게는 용기가, 로맨스를 포기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은 로맨스에 관한 영화이자, 용기에 관한 영화이고, 또한 신념에 관한 영화이며, 선택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랑의 쟁취에 필요한 모든 진실을 담고 있는 영화인 것이다. 풀어 말하자면 순서는 이렇다. 먼저 선택을 해야 한다. 냉정이냐, 열정이냐, 이성이냐, 감성이냐 하는 어떤 신념, 어떤 가치관을. 뭐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영화에서 마릴린은 냉혹한 이성주의자다. “굉장히 돈 많고, 아무 여자한테나 껄떡대고 만날 바람 피우다가 들키는 호색한”으로 자신의 이상형을 선택한 그녀는 한번의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념’을 ‘용기’있게 밀어붙인다. 그것도 아주 주도면밀하게, 위장결혼을 위한 위장결혼극까지 꾸며가면서 말이다.

선택은 정반대에서 하지만 신념과 용기와 추진력에서는 마일즈도 마릴린에 못지않은 인물이다. 마릴린이 ‘냉정’이라면 마일즈는 ‘열정’덩어리다. 결혼서약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마릴린에게 노골적으로 껄떡대는 건 애교 수준이다. 마릴린의 유혹에 풍덩 빠진 그가 셔츠자락도 정리하지 못한 채 가정변호사협회(?) 세미나에 가서 “사랑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좋은 것”이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라. 그러나 압권은 바로 그 다음 장면. 모든 게 마릴린의 사기였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감동적인 연설로 인해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살인청부업자에게 마릴린을 죽이라고 전화한다. 그랬다가는 마릴린이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게 된 사실을 알자 또 미친 듯이 달려가서 살인을 막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마일즈로서는 진심어린 열정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정말 사랑했다가, 정말 증오했다가, 다시 정말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는 엄청난 열정의 소유자가 아닌가. ‘냉정과 열정 사이’는 바로 마릴린과 마일즈 두 사람의 사이를 묘사하기에 적당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성향은 정반대이지만 신념과 용기만은 자웅을 겨루는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역시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비자발적 독신의 괴로움을 표할 때마다- 이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관계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지도 오래 됐지만-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은 세상에 없어.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먼저 정하는 게 필요해. ” 마릴린(냉정)이거나 마일즈(열정)이거나, 로맨스이거나, 현실이거나 이런 걸 먼저 선택하고 그 신념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연애질을 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로맨스가 필요한 시점에 항상 현실을 들이대고, 현실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 시점에 대책없는 로맨스에 허우적거리는 삽질을 10년 가까이 성실한 태도로 반복해왔다. 반성한다.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뒤돌아보거나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잘생기고, 지적이고, 유머감각 있고, 돈 많은 조지 클루니 같은 사람을… 흠….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