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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찾는 협객,허영만의 <식객>
권은주 2003-11-17

어쩌다 외국의 여행지에서 사귀게 된 친구들이 물어온다. “한국은 가볼 만해? 뭐가 좋아?” 그러면 잠시 고민해본다. 발이 닳도록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닌 녀석들을 웬만한 걸로 꼬실 수 있을까? 동양식 고궁이라면 일본이나 중국에도 많이 있고, 걸어서 돌아볼 만한 아담한 도시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산과 강은 좋지만 아웃도어 레저를 즐길 곳도 많지 않고…. 하지만 딱 하나. 정말로 자랑할 만한 게 있다. “한국은 말이야, 정말로 맛있는 게 많지. 게다가 음식값도 참 싸지. 반찬도 서너 가지는 기본으로 준다고. 물도 공짜고 팁도 안 내. 그러고보니 내 입에 군침이 도네. 어때, 같이 다녀볼래?”

일본에서부터 불어온 요리만화 붐 속에서 참으로 답답하고 목말라했던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먹는 문화라면 일본이든 중국이든 지지 않는 우리인데 정말 미식의 귀감이라 할 만한 한국 요리만화 한편 펴들고 팔도유람을 해볼 순 없을까? 지성이면 감천이랬나? 드디어 나타났다. 나타났다뿐이냐. 웬만한 신인이라도 감지덕지할 텐데 대가 중의 대가 허영만이 젓가락과 펜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간지에 연재되어 잔잔한 입소문을 만들어내던 <식객>(김영사 펴냄)이 단행본으로 발간되어 눈맛과 입맛을 마구 당기고 있다.

성찬은 트럭 하나에 여주 고구마, 강원도 햇감자, 충청도 단호박 등 팔도에서 올라온 싱싱한 식재료들을 싣고 이 동네 저 동네 팔러다니는 속칭 ‘차장수’다. 겉보기엔 확성이 요란한 장사꾼이지만 그는 식당주인에게 적당히 값을 후려쳐 몇푼 이익을 얻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좋은 재료로 좋은 맛을 내는 일을 도와주고, 자신이 찾아내지 못한 진미를 발견하는 데 땀을 흘리는 식객이다. 어중이떠중이 밥벌레가 아니라 맛의 협객인 것이다.

성찬의 뒤에서 한국 최고의 맛을 차려내기 위해 애쓰는 허영만의 진득한 조사와 단정한 그림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풍성함을 보여준다.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 다리에 올라간 사람을 전어 냄새로 꼬드겨 술판을 벌이고, 어린 시절 입양되어갔다 어머니의 밥맛을 찾아온 젊은이를 통해 쌀의 참의미를 일깨워주고, 불행했던 시절 미군에 얻은 햄과 소시지에 김치와 국물 맛을 더한 새로운 한국 음식 ‘부대찌개’에 자부심을 더한다. 전문적인 소재를 잡으면 누구보다 깊이 들어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허영만의 솜씨가 살아 있는 만화다.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이 만화를 <맛의 달인> <미스터 초밥왕>과 같은 일본의 요리만화들과 비교한다. 만화의 흥미를 북돋우기 위한 ‘대결의 구도’라는 측면에서, <식객>은 다른 요리만화를 통해 전범으로 형성된 구조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 사실로 보인다. 외국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최고의 한국 맛을 보여주라는 잡지 편집장의 도발적인 제안, 성찬과 운암정 오봉주의 오랜 경쟁관계를 판가름하기 위한 공개 대결, 백화점의 쇠고기 납품을 위한 요리 경연대회…. 확실히 어딘가 낯익은 장면들이다. 여러 요리만화들이 범람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설정들을 겹쳐 만들고 있는 상황이니, 대결이 불가피하더라도 뭔가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달라는 기대가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허영만은 한 가지 구도를 끈질기게 이어가지 않고, 그때그때 새 구도를 만들어 사용하고 버리는 정도로 만화를 이어가는 듯하다. 중요한 후계자 결정의 순간에 양보를 하고 길을 떠나는 성찬의 태도는 무척이나 한국적으로 보인다.

만화의 에피소드들 속에서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외형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맛’은 지금까지 어떤 만화에서도 만나지 못한 한국적 특성이 분명하다. 16세기에 들어온 멕시코의 고추가 이 나라의 독특한 풍토 속에서 새로운 맛을 익혀낸 김치가 되고, 조선 왕조의 남자 궁중 요리사로서 맛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정을 깨닫게 해주는 대령 숙수…. 새삼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만화가는 “이게 맛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래야 맛있다”며 주장을 펼치고자 하는 의지가 적지 않아 보인다. 일제 때 내려진 술의 제조 허가제인 ‘주세령’이 해방 뒤에도 사라지지 않아 와인이나 스카치 위스키 못지않은 전통을 이어올 수도 있었던 곡주문화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가슴속의 무언가를 콕 찔러준다. 그러나 가끔은 너무 전능한 식신(食神)들이 넘쳐나 반론의 생동감을 막아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맛을 모르는 사람이나 이견을 가진 사람을 지나치게 깔보는 과도한 영웅주의, 계도의 무례함이 <맛의 달인>이 지닌 싸구려 조미료 맛인데, 이 만화에도 그런 맛이 스밀까 조금은 두렵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