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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신문 제26호(1961∼1963)
이유란 2003-12-11

영화사신문 제26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62 ∼ 1963

<만주인 포로> “케네디, 미안하오”

케네디 암살 사건에 책임느껴 영화상영 중단

1963년 말, 존 F. 케네디의 죽음이 <만주인 포로>의 ‘실종’을 불러왔다. <만주인 포로>가 11월23일 케네디 암살 사건 직후 극장가에서 사라졌다. 케네디가 사망하자 배급사가 일종의 ‘책임’을 느끼고 영화 상영을 중단한 것이다. 개봉한 지 1년이 지난 영화가 새삼 문제가 된 것은 <만주인 포로>가 대통령의 암살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의 <만주인 포로>는 6·25 전쟁에 참전하고 귀향한 미군들이 겪는 고통을 그린 영화. 주인공인 마르코와 쇼는 참전 당시 북한군의 포로로 잡혀 공산주의 사상을 세뇌받았다. 그때 겪은 고문으로 악몽에 사로잡힌 마르코는 공산주의자들이 쇼에게 동료들을 죽이는 것은 물론 미국 대통령을 암살하도록 세뇌시켰다고 믿게 된다.

케네디 사망 뒤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여기, 곧 영화에 대통령의 암살이 언듭되고 있는 대목이다. 사실 이 부분은 그 내용의 민감함 때문에 영화제작 전부터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 대표 아서 크림은 거듭해서 시나리오상의 이 부분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영화의 주연배우이자 제작자인 프랭크 시내트라는 이러한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가까운 사이였던 케네디를 직접 찾아가, 원래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찍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케네디 사망 이전에도 <만주인 포로>는 1962년 시사회 직후 이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좌파와 우파 모두, 이 영화가 상대 진영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곧 공산당이 발행하는 <민중의 세상>은 <만주인 포로>가 “미-소간의 긴장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가장 악랄한 시도”라며 이 영화에 “독약”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반면, 가톨릭 비평가인 윌리엄 무어링은 좌익 프로파간다를 숨긴 영화라고 쏘아붙였다. 또한 남부 캘리포니아의 재향군인회는 “<만주인 포로>는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영화산업에 스며들었다는 증거”라며 “HUAC는 할리우드를 재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념의 대립은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의 한 극장에서 <만주인 포로>가 개봉하던 날 극명하게 드러났다. 곧 이날, 극장 앞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반공산주의자들이 나란히 서서 피켓 시위를 벌이는 진풍경이 연출됐던 것이다.

“관습·구속으로부터 자유”

독일 오버하우젠영화제 “새로운 영화 창조” 선포

1962년 2월28일 독일 오버하우젠영화제에 모인 26명의 젊은 영화인들이 낡은 영화의 죽음을 알리는 ‘오버하우젠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상업적인 독일 영화산업의 붕괴로 영화제작의 경제적 기초가 옮겨가고 있다”라며 “그 결과 새로운 영화가 도래할 기회가 왔다”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그들은 “우리는 기존 산업에 만연된 관습으로부터의 자유, 상업적 배려에서 나온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바탕으로 새로운 독일영화를 만들 수 있는 내용과 형식과 경제적 구조에 대하여 구체적 논리를 갖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날 선언에 참가한 영화인들은 주로 단편영화 감독들. 아직 장편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은 그러나, 단편영화로 지난 몇년간 국제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고 비평가들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에게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이러한 성공은 독일영화의 장래가 새 영화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놓여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라고 자신했다.

젊은 영화인들은 선언문 발표 이전 여러 차례 한자리에 모여 독일영화의 현재와 미래 등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러한 연대감을 바탕으로 이들은 장편영화에서도 새로운 독일영화를 창조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선언문은 “낡은 영화는 죽었다. 우리는 새 것을 신봉한다”로 끝난다.

미국 ‘멀티플렉스’ 탄생

미국 극장가에 ‘멀티플렉스’가 등장했다. 1963년 스탠리 H. 더우드는 미조리주 캔사스시티에 있는 쇼핑센터 안에 두개의 작은 상영관을 가진 극장을 오픈했다. 이로써 관객은 쇼핑과 영화관람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됐다. 복합관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사실, 쇼핑센터 극장은 1960년대 초부터 미 전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영화잡지인 <박스오피스>는 1961년 쇼핑센터 극장을 “영화계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라고 평했다. 쇼핑센터 극장은 몇 가지 점에서 기존 극장사업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곧 도심 안에 있는 극장들은 너무 낡아 철거해야 할 형편이었고, 드라이브 인 극장은 교외의 땅값 상승으로 새로 극장을 여는 데 돈이 많이 들었다. 반면 쇼핑센터 극장은 극장건물을 따로 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관객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한편, 스탠리 더우드는 얼마 전 문을 연 멀티플렉스가 일단 성공했다고 보고, 앞으로 AMC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설립해 다른 지역으로 멀티플렉스를 확장할 예정이다.

니콜라스 레이 ‘불행의 반전’

<북경에서의 55일> 흥행참패로 할리우드 등돌려

“그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영화관에 가지마라, 더이상 영화를 보지마라. 그런 사람은 좋은 영화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감독’에 대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상찬이다. 그런데 요즘 이 감독, 실의에 빠져 마약과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다시는 할리우드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리라는 절망감 탓이다. 니콜라스 레이가 바로 ‘이 감독’이다.

니콜라스 레이는 ‘뛰어난 감독’으로 통했다. 특히 유럽의 평론가들이 그의 영화에 열광했다. 그럴 만도 했다. 데뷔작인 <그들은 밤에 산다> 이후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잇따라 성공작을 내놓았으니까. B급 필름누아르인 <그들은…> <외로운 곳에서>, 변주된 서부영화인 <쟈니 기타>, 새로운 세대의 도래를 알린 <이유없는 반항>, 그리고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자 페레둔 오뵈다로부터 레이의 최고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1958년작 <파티 걸>까지, 그의 영화 대부분이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보였고 그 덕에 언제나 비평적인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60년대 들어 대규모 시대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의 영화인생은 ‘불행의 반전’을 맞게 된다. <왕중왕> <북경에서의 55일>의 잇단 흥행실패가 문제였는데, 그중 결정타가 된 건 1963년작 <북경에서의 55일>이었다. 이 영화의 실패 이후 그는 사실상 할리우드에서 쫓겨났다. 그가 연출하기로 되어있던 영화들은 다른 감독들에게 넘어갔다.

<북경에서의 55일>은 무려 1700만달러가 들어간 대작 프로젝트. <아라비아의 로렌스>보다 200만달러가 더 들어갔다. 레이는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스페인 마드리드 교외에 1900년대의 베이징을 통째로 재현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영화를 촬영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수만명의 중국인 엑스트라들을 그곳으로 불러모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비평과 흥행에서 참패해 레이를 나락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장 뤽 고다르 인터뷰글쓰기도 영화를 만드는 한가지 방법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놀라웠다. 비평가였던 장 뤽 고다르는 이 한편의 영화로 그때까지 데뷔한 수십명의 신인감독들을 제치고 단숨에 누벨바그의 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해마다 새로운 실험물들을 내놓고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1962년 11월 고다르를 만났다. 비평가, 감독이기에 앞서 영화광인 그는 인터뷰에서 ‘영화를 살다’(live the cinema)라는 표현을 여러 번 입에 올렸다.

비평가로서의 경험이 영화를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카이에 뒤 시네마>의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미래의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글쓰기는 영화를 만드는 방법의 하나였다. 글쓰기와 연출, 그 사이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지 질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중에 유일하게 100% 비평가는 앙드레 바쟁뿐이었다. 비평가 시절 나는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비평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에세이스트이다. 예전에는 글을 썼던 거고 지금은 영화를 만든다. 혹여 영화가 사라진다면 나는 텔레비전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이 사라진다면 종이와 연필로 되돌아갈 것이다. 모든 형태의 표현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이다.

처음 영화를 만들었을 때, 영화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나. 우리의 데뷔작들은 모두 시네필의 영화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 때 이미 영화에서 보았던 것을 참조한다. 그건 순수하게 영화적인 태도였다. 촬영을 하면서 프레밍거, 쿠커 영화의 장면을 기억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인용했다.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인용한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인용할 권리가 있다. 누벨바그의 꿈은 할리우드에서 1천만달러짜리 <스팔타커스>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난 저예산영화가 불편하지 않지만, 자크 드미 같은 감독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누벨바그가 거대영화에 대해 저예산을 옹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나쁜 영화에 대해 좋은 영화를 옹호하는 것이다. 분명 저예산으로 만들어서 더 좋은 영화도 있지만, 더 많은 예산이 들어가야 더 훌륭한 영화도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 <비브르 사비>를 1억프랑에 만들라고 제안했으면 어땠을 것 같나. 거절했을 거다. 그게 영화 만드는 데 무슨 소용인가. 미국식 제작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데에도 이점이 있다. 하지만 제작비가 커지면 그 영화는 프로듀서의 영화가 돼버린다. 오직 프랑스에서만이 프로듀서들이 작가라는 개념을 인정했다. 최고의 이탈리아 프로듀서들도 감독을 고용인 정도로 여긴다. 그래도 미국과 이탈리아의 영화산업에 차이는 있다. 이탈리아 산업은 무가치한 반면 미국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정말, 전세계에서 최고였다. 미국인들은 단순함 속에 깊이를 불어넣을 줄 안다. 그들은 리얼하고 자연스럽다. 프랑스인들도 프랑스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이전에 프랑스를 보려고 애썼던 사람은 자크 베케르뿐이었다. 다른 감독들은 리얼리티를 찍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영화 따로, 인생 따로였다. 그들은 영화를 살지 않았다.

단 신 들

오즈 야스지로 60년생 마감

1963년 12월12일 일본 감독 오즈 야스지로가 자신의 60번째 생일날 저녁, 세상을 떠났다. 지난 4월 중순에 병원을 찾아 암 선고를 받은 그는 그로부터 일년을 넘기지 못했다. 투병 중에도 그는 동료들에게 9월에는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927년 시대극 <참회의 칼>로 데뷔한 그는 <어느 가을날 오후>까지 모두 33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마를린 먼로 의문의 죽음

1962년 8월5일 마를린 먼로가 전화기를 손에 꼭 쥔 채 침실에서 죽어 있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수면제 과도 복용으로 추정된다. 유서는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5월21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에서 열렸던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파티가 먼로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자리였다.

<RoGoPaG> 국교모독죄 인정 - 파졸리니 4개월 집행유예

1963년 5월11일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에게 국교모독죄가 인정돼 4개월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파졸리니는 옴니버스영화 <RoGoPaG>에서 국교를 모독했다는 혐의로 고소됐다. (Ro는 로셀리니, Go는 고다르, Pa는 파졸리니, G는 그레고레티를 뜻한다)의 한 에피소드인 <백색 치즈>에서 파졸리니는 종교의 메시지와 이를 전하는 종교인들간의 모순을 그려내 교계의 반발을 샀다. 예수에 관한 영화를 찍는 촬영장이 <백색 치즈>의 배경. 촬영 도중 주인공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알고보니 그가 잔치에서 백색 치즈를 너무 많이 먹은 것이 사인이라는 설정을 통해 파졸리니는 가톨릭을 저속화하는 종교인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007시리즈 ‘스타트’

1962년 제임스 본드 시리즈 첫 번째 영화 <007 살인번호>가 개봉했다. 1961년 영국의 제작자인 알버트 쿠비 브로콜리와 해리 샬츠만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와 계약을 맺어 앞으로 7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영화마다 액션, 이국적인 로케이션, 시각효과가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 계약의 내용이었다. 이안 플레밍의 소설에 등장하는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닥터 노>는 테렌스 영이 감독을, 숀 코너리가 주인공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