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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더욱,살고 싶다, <프리다>

아가씨, <프리다>에게서 희망을 엿보다

세상의 모든 그림들은 나를 흠칫, 멈춰 서게 한다. 그러나 결코 저 그림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미술은 내게 그렇게 ‘쪽팔리는’ 외사랑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영화 <프리다>는 프리다의 사랑과 불행에 초점을 맞추지만, 나는 영화를 핑계삼아 그녀의 그림을 호흡하고 싶어졌다. 영화를 보자마자 그녀의 전기를 구하러 서점으로 질주했다. 책을 펼치는 순간. 프리다는 한 그림을 1분 이상 응시하지 못했던 내게, 가장 오랫동안 그림 앞에 서 있기를 허락한 친구가 되었다. 고통에 지지 않는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아니라 고통에 매순간 굴복하여 멍들고 그을은 표정들. 그러나 그녀의 화폭은 못 말리는 장난기와 밉지 않은 심술이 숨쉴 수 있는 여백으로 넉넉하다. 프리다는 트로츠키 ‘영감’에게도, 심지어 자신의 ‘불구의 신체’를 향해서도 야한 농담을 서슴지 않는다. 엄숙함으로 도배한 모든 권력의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일그러뜨리는 일자 눈썹의 어릿광대, 프리다.

그녀의 그림은 전율과 충격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뒤, 한참 동안 그림 앞에서 얼쩡거리게 만든다. 이윽고. 숨죽인 기억들이, 애써 눈감으려 했던 저잣거리의 맵고 쓴 풍경들이, 그림과 뒤엉켜 춤사위를 벌인다. 어느새 프리다도 그녀의 그림도 나도 배시시 웃고 있다. 그림 속 프리다가 달걀만한 눈물을 뚝뚝 흘릴 때조차도 울고 있는 그녀가 오히려 내 등을 쓸어준다. “우리는 그녀를 위로하러 갔다가 위로받고 왔다.” 그녀는 칼로 아내를 스물두번 난자한 남편과 아내의 주검을 선혈 낭자하게 휘갈겨놓곤, 속삭인다. “웃음보다 가치있는 것은 없다. 웃음을 터뜨리는 것, 자기를 내던지고 가벼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힘이다. 비극처럼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다.” 가공할 전차사고와 서른다섯번의 대수술. 19살의 프리다에게 “죽음은 이미 아주 즐거운 농담”이었다.

상처로부터 탈주는 시작된다. 병원침대에 결박당해 사방을 둘러싼 벽만이 그녀의 유일한 풍경이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그림을 시작한다. 이제 그녀는 빈곤과 학살로 얼룩진 멕시코의 ‘거리’를 ‘풍경’으로 바라보기를 멈춘다. 프리다는 유럽 문명의 색감에 서린 우울과 불안을 감지했고 멕시코인디언의 투박하고 생기넘치는 빛깔들에 공명했다. 그녀에게 사회주의는 거대한 관념의 무기가 아니라 병자의 상처를 애무하는 손길이었다. 앙증맞게 그려진 마르크스는 그녀로 하여금 목발을 집어던지고도 꼿꼿이 설 수 있게 했으며, 그림 속 그녀는 목발 대신 <자본론>을 그러쥐고 있다. “내가 울고 있지 않은 그림은 이 그림이 처음이야.”

영화는 프리다 부부의 커플의 관계에 집중한 나머지, 그녀를 둘러싼 다양한 빛깔의 우정과 연대의 선들을 그려넣는 데는 소홀하다. 그러나 프리다의 힘은 멀쩡한 어느 누구보다도 억세게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 그녀의 집은 탈주자들의 아지트였고 혁명가들의 파티장이었다. 프리다의 그림은 혁명의 환희를 연주하는 악기였다. 그녀의 그림은 자신의 고통을 영매삼아, 사물과 자연과 타인의 신음소리를 토하게 하는 씻김굿이 된다. 상처는 그녀의 무기도 알리바이도 아니다. 프리다는 상처와 놀고 상처를 구슬리고 상처를 통해 타자와 교감한다.

악몽과 단말마로 얼룩진 그녀의 그림 앞에서, 나는 더더욱, 살고 싶다. 그것도 아주 신명나게. 그녀는 위대한 화가로 대우받는 것보다 유쾌한 인간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프리다는 욕망이 고여 흐르지 못하는 상황을 가장 증오했다. “삶에 의해 매번 살해당하는” 자가 살아 있는 채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매번 다시 태어나는 일뿐이 아닐까. 죽음의 문턱마다 그녀는 매번 다른 존재가 되었고, 그녀의 수많은 자화상들은 하나같이 경이로운 차이들로 변주된다. 그녀의 수백통의 연애편지 속 ‘널뛰는’ 언어들을 통해, 실로 오랜만에 아무런 괄호도 각주도 없이 말갛게 웃을 수 있었다. 프리다의 마지막 작품 제목은 <인생만세>다.

정여울/ 미디어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