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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울엄마>, ‘엄마’라는 이름

<달려라 울엄마> KBS2TV 월∼금 저녁 9시20분

엄마가 없는 집은 언제나 허전했다. 중학교 때였던가. 마침 시험기간 중이어서 평소보다 일찍 귀가한 날이었다. 여느 여자아이들 같았으면 사춘기로 접어들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도 있었을 텐데 난 그날따라 엄마의 부재가 몹시도 허전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내가 아직 덜 여문 유아기적인 어리광을 가지고 있어서였다기보다는 엄마는 항상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간식과 식사를 준비해주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집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 맛있는 부침개와 호떡을 해주며 우리가 먹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봐주는 사람, 우리가 없는 시간에는 집안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내가 언제나 뽀송뽀송하게 입고 다니는 옷가지를 빨래해주는 사람, 옆에 있으면 당연하고 부재시에는 짜증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간 어느 날 나는 엄마의 숨겨진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시장 한구석에 있던 신발가게에서였다. 신발을 사러 갔는지 무엇을 하러 갔는지 목적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엄마는 무엇 때문에 그 가게에 갔는지 잊으신 듯 중년의 신발가게 주인과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흔연스럽게 웃는 것이었다. 한번도 그런 모습을 집에서 지켜본 적이 없었던 나는 속으로 무척 놀랐었다. 혹시 저 남자가 시장에 숨겨놓은 엄마의 애인인가? 그토록 그때의 엄마는 당당하고 여유있고 유머있는 한 여자였다. 더 놀라운 것은 엄마의 애인은 참기름 가게에도 있었고 야채가게에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를 바라보는 그들의 자연스럽고 즐거운 표정에서 나는 심지어 시장의 고객관리는 그렇게 하는 것인가보다 하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난 그날 미묘하게도 집에서 쪼그라들어 있던 엄마에서 당당하고 활기찬 한 인간의 모습을 훔쳐본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엄마’는 철저하게 엄마라는 이름 아래 종속된 어떤 역할만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달려라 울엄마>에서 김영애가 보여주는 엄마의 모습도 내가 가지고 있던 사춘기의 관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막내아들 천재에게 약 한첩 지어 먹이려고 다른 자식들 눈치보는 모습하며, 삼수생인 외동딸의 입시를 앞에 두고 성당, 절, 교회를 가리지 않고 지성을 드리다가 입시생보다 먼저 몸져눕는 모습들은, 자식들 뒤에서 소리없이 받쳐주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의 안간힘이었다. 엄마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당신은 알고 있는가? 누군가의 제자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죽고 못사는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심지어 누군가의 애타는 연인이기까지 한 엄마의 모습을. 엄마와 그 친구들이 어울리던 여고 교실 안에서 엄마는 아직 엄마가 아닌 한 소녀였고 아빠의 부재를 틈타 한판의 고스톱에서 화투짝을 올려붙이는 엄마는 아직 재미와 오락을 추구하고 싶은 한 장난꾸러기였고 고교 시절 이후로 한 남자 후배의 눈앞에서 엄마는 몰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한 여인이었다.

갑자기 난 사춘기 시절 의아하게 바라보던 엄마의 애인, 신발가게 주인과 참기름가게 주인 아저씨를 떠올렸다.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에도 난 나의 엄마를 누군가의 애인으로 바라보는 것이 낯설다. 천재가 엄마의 비밀스런 짝사랑 문종에게 도전적인 것처럼. 그러나 ‘엄마’라는 이름 아래 감추어진 그 수많은 얼굴들을 뜨뜻하게 감싸안을 때가 되었음을 <달려라 울엄마>는 내게 보여주었다.

엄마가 된 이후 잠재되어 있는 다른 이름들은 가족 중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 한번씩 서로 다른 뉘앙스로 “영애야”, “영애씨” 하고 가족 이외의 누군가에 의해 그녀가 불리는 소리를 들을 때, 불현듯 여고 시절 교실 안으로 되돌아가는 소녀가 나타나고 문종의 애틋한 연정과 사랑스런 상상 속에서 귀엽고 수줍은 연인이 나타날 때마다 “엄마”와는 매치되지 않는 그 낯섦을 기호 아래 도사린 규정할 수 없는 꿈틀거림으로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해마다 가족들 속에서 아내이기를 엄마이기를 그만두거나 거부할 수밖에 없는 여인들이 탄생한다. 우리는 그들을 규정할 수 있는 그 어떤 이름 아래 둘 수 없어서 당황해한다. 그러나 이름 안에 가두어두는 일을 이제 심각하게 반성해보자. 어느 날 ‘엄마’라는 이름조차 불리는 날이 가족 안에서도 드물어지고 젊은 시절 잠재되어 있던 다른 얼굴들마저 사라져서 빈 공허만이 맴돌 때 또한 우리는 당황스럽지 않는가? 그런 때 그들을 또다시 ‘할머니’라는 대용어로 가두어두려고 하지만 말고 꿈틀거리는 건강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게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길이 또한 언젠가 엄마가 되어 잠재된 수많은 얼굴을 가진 채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의 딸들이 건강하게 살아남는 중요한 방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素霞(소하)/ 고전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