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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립싱크를 허하라

한때 한 인기 댄스그룹의 멤버가 ‘붕어’라는 소문이 있었다. 노래를 못해 다른 사람이 대신 더빙한 목소리에 그저 입만 벙긋벙긋한다는 것이다. 그 그룹이 라이브를 할 때면, 나의 촉수는 그 ‘언니’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노래 잘하는 멤버가 그 언니의 노래를 은근슬쩍 함께 불러주거나 그 언니가 불러야 할 부분을 다른 멤버가 대신 부르는 장면을 ‘발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언니가 전혀 괘씸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처로웠다. 라이브가 끝날 때마다 제발 무대 뒤에서 그 언니가 쪽팔려서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언니가 노래보다는 춤을, 춤보다는 얼굴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 가요산업 시스템의 희생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도 ‘언니, 오빠’들은 측은하다. 바야흐로 가요시상식 춘추전국시대다. 가요시상식의 난립으로 저마다 최고의 권위를 내세우지만 정작 권위는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평소 립싱크에 너그럽던 방송사도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가수에게 라이브를 강권한다. 12월12일 <스포츠서울>이 주최하고, SBS가 생중계한 <서울가요대상> 시상식에서 평소 보기 힘든 ‘인기가수’들의 라이브가 이어졌다. 이날 본상을 수상한 ‘비’는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춤과 노래를 함께하는 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불렀다. 노래의 편곡을 좀 바꿔서 춤을 먼저 추고, 노래는 서서 부르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쥬얼리’는 춤을 추면서 노래까지 멋지게 해내 충격을 주었다. 근데 자세히 보니 라이브가 아닌 듯했다. 이날의 압권은 이효리의 〈10minutes〉였다. 시작할 때 분위기 좋았다. 검은 모자에 검은 넥타이로 코디한 이효리는 예의 그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전주가 나오는 15초 동안만 좋았다. 막상 노래가 시작되자 음정이 흔들리고, 박자가 어긋났다. 이효리는 엉거주춤 서서 손동작만으로 율동을 때우는 전형적인 라이브 무대로 돌입했다. 노래가 흐를수록 동작은 단순해졌다. 이효리가 “붉은색~ 립스틱~ 화장을 덧칠하고~”라고 노래할 때는 그의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아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아, 에코 빵빵하고, 춤동작 죽이는 립싱크가 한없이 그리워졌다.

4분짜리〈10minutes〉은 10분이나 되는 듯 지루했다. 가수에게는 가혹하고, 시청자에게는 재미없는 라이브는 왜 하게 된 걸까. 가수는 무릇 노래를 잘해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연말시상식의 권위를 위해? 어쨌든 짱나는 일이다. 인기가수들의 줄타기 라이브가 끝났다. 사회자가 “대상, 이효리!”를 외쳤다. 되레 대상을 받은 이효리가 불쌍했다. 사회자의 말대로 “멋진” 라이브를 또 해야 하다니. 흑흑흑….

이런 라이브는 <서울가요대상>에 앞서 열린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도 선보였고, 연말에 잇따를 각 방송사의 가요대상 시상식에서도 이어질 것이다. 가수의 춤출 권리를 박탈하고, 시청자들의 즐길 권리를 침해하는 라이브를 왜 해야 하는가? 어차피 그 가수들의 형편없는 노래 실력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 아닌가. 누가 이효리에게 ‘가창력’을 기대하는가? 누가 얼마나 노래를 못하는지, 큰 ‘삑사리’를 내는지 보는 스릴을 맛보기 위해서인가? 꼭 노래방에서 음치한테 노래를 시키고야 마는 고약한 심보가 떠오른다.

언젠가 H.O.T의 한 멤버가 립싱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우리는 가수라기보다는 엔터테이너이다. 엔터테이너에게 노래 못지않게 춤도 중요하다.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립싱크를 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이 반쯤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가요산업의 현실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물론 노래 잘하는 가수가 음반 많이 파는 ‘사회정의’와 다양한 음악장르가 공존하는 ‘민주질서’를 원한다. 그러나 대중문화 관련 단체가 수년째 ‘라이브’를 외치고, ‘다양한 음악장르’를 요구해왔지만, 현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시민의 ‘압력’에 음반 제작자들이 이제는 얼굴 안 보고 가수를 뽑는가? 방송사는 다양한 장르의 라이브 무대를 선보이고 있는가? 시청자들은 언니의 예쁜 외모와 오빠의 멋진 춤을 외면하는가? 차라리 ‘아사리’ 판을 거덜내고, 혁명을 하자면 이해하겠다. 그렇지만 개혁의 명분으로 ‘준비되지 않은’ 가수들에게 라이브를 요구하는 것은 좀 공허하다. 이 짜고 치는 고스톱 판에서 나온 모든 부담을 언니, 오빠들이 고스란히 떠안으라니, 좀 가혹하기까지 하다. 빠돌이 티내냐고? 그렇다, 나는 20년째 연말 가요시상식에, 인기가요 순위프로그램에 목을 매온 빠돌이고, 빠순이다. 그러니 우리 언니, 오빠 좀 괴롭히지 마라. 그들에게 립싱크를 허하라.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