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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취인불명
2001-05-29

시사실/수취인불명

Story

혼혈아 창국(양동근)은 기지촌에서 어머니(방은진)과 함께 살면서 난폭한 개장수(조재현)의 조수 노릇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미국으로 간 뒤 소식이 없는 창국의 아버지에게 20년 가까이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오는 편지를 부치며, 미국으로 갈 날만 기다리다 반실성했다. 창국은 어머니가 편지를 부칠 때마다 어머니를 구타한다. 어머니의 애인인 개장수는 이런 창국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같은 마을에는 한쪽 눈이 백태가 된 소녀 은옥(반민정), 그를 사모하는 못난이 청년 지흠(김영민)이 살고 있다. 어느 날 불량한 미군 제임스가 은옥에게 다가와 눈을 고쳐주겠다고 제안한다. 불길한 인연이 교차하면서 이들 사이에 애증의 거미줄이 얽혀든다.

Review

편지는 끝내 전해지지 않는다. 너무 늦게야, 제때 왔으면 구원이겠지만, 이젠 휴짓조각보다 나을 바 없는 답장이 날아온다. 징그러워 외면하고 싶지만,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은커녕 위안조차 받지 못하고, 원치 않던 저주의 낙인을 지니고 살다 끝내 세상의 배설물이 되어 내버려지는 족속들이 있다. 잔혹한 세상을 비난하면서 <수취인불명>은 이들에게 값싼 연민을 보내는 시선에도 침뱉는다. <수취인불명>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은 감상적 동정을 허락하지 않는 추하고 역겨운 비극이다. 그래서 온건한 휴머니스트들의 비위를 시험하는 잔인한 비극이다.

극단적인 논란의 와중에서도 놀라운 다산성을 과시해온 김기덕 감독은 여섯 번째 영화 <수취인불명>에서도, 늘 그랬듯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악취를 불어넣는다. 김기덕의 영화적 악취는 주로 시각적 역겨움과 행위의 잔인성에서 온다. <수취인불명>의 인물들은 동정을 얻기에 너무 추하고 가학적이다. 미국으로 간 뒤 소식을 끊은 흑인 병사에게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보내는 반미치광이 여인, 개장수 조수 노릇를 하면서 어머니를 구타하는 혼혈아 아들, 어린 시절 오빠의 총장난으로 한쪽 눈이 백태가 돼버린 소녀, 소녀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눈이 치료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폐적 청년, 소녀의 몸을 얻기 위해 그녀의 눈을 치료해주는 미군 병사. 이런 사람들의 얼굴을 거부감 없이 정면으로 쳐다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다 흉포한 개잡이의 동물학대와 배설물이 뒤엉킨 진창, 젖가슴의 문신을 칼로 도려내는 끔찍한 장면까지 지켜봐야 한다. 김기덕 감독은 감탄할 만한 일관성으로 넘치는 역겨움을 연출하면서도 관음은 차단한다. 은밀한 시각적 쾌락이 될만한 강간장면은 비닐하우스 밖에서 롱숏으로 비치며 미군 병사와 소녀의 간음은 그저 무심하게 서 있는 카메라로 관찰될 따름이다. 보편적 인간애는 이미 글러버린 일이고, 한 인간에 대한 이해조차 얼마나 큰 감각의 고통을 동반하는지 김기덕 감독은 직접 실감케 한다.

여전한 도발이지만, 김기덕 감독은 이야기의 보폭에서 전작들을 성큼 뛰어넘는다. 그의 영화로선 처음으로 역사적 지평을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1970년대, 어느 가을’이란 서브타이틀과 함께 펼쳐지는 <수취인불명>의 공간은 그의 전작들, 예컨대 <섬>의 낚시터처럼 추상적 폐쇄공간이 아니라 기지촌이라는, 그러니까 전쟁과 미군 점령이란 역사적 사건이 낳은 구체적 공간이다. 이야기에서도 추한 현대사는 구성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수취인불명>이 파헤치려는 건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뒷간에 오물처럼 버려진 인간들이다. 김기덕 감독은 적어도 여기서 비주얼 연출력은 있지만 이야기의 재능은 없다는 한 가지 편견은 확실히 제압하고 있다. <수취인불명>은 근래 한국영화에서 발견하기 힘들었던 세련된 서사의 영화다. 역사적 소재를 끌어들였으되 결국 장르적 관습으로 빠져나갔던 몇몇 고예산영화들과 달리, 김기덕은 역사와 정면승부하면서도 촘촘한 코의 이야기그물을 만들어낸다. 한국현대사의 재난은 여러 경로를 통해 빼앗긴 시력을 낳고 지울 수 없는 문신을 낳으며 탈색할 수 없는 피부를 낳는다. 무엇보다 숨겨진 권총으로 살아남아 인물들 사이를 떠돌다가 마침내 안전장치를 풀어버린다.

한쪽 눈을 가린 세 인물이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처럼 표현 과잉의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 없지 않다 해도, <수취인불명>에선 많은 인물들이 갖가지 모티브를 통과하는데도 구성의 긴장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노련한 이야기꾼의 솜씨다. 서정적 톤의 화면 및 음악은 그로테스크한 표현과 때로 충돌하지만 <파란 대문> 이래 가장 찡한 합주를 들려준다. <수취인불명>은, 추상적이고 신화적인 설정의 전작들의 표현을 이어받으면서도 그것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김기덕 연작의 완결편이다.

허문영 기자 moon8@hani.co.kr

“김기덕 지지, 엽기 때문이 아니다”...김기덕 영화의 관객

<수취인불명>의 제작사 LJ필름은 개봉을 앞두고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벌였다. 설문조사는 마니아들과 일반관객 2천명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일반관객 중 35% 정도가 김기덕 감독에 대한 호의를 표했다. 흥미로운 건 김기덕의 엽기성이 옹호의 주된 이유가 아니라는 것. 김기덕 영화의 인상요소로 인간이면탐구와 색채를 옹호그룹이 꼽았고, 그를 비판하는 관객은 충격적 묘사를 가장 1위에 꼽았다. 요컨대 김기덕에 대한 지지는 엽기 취향과 무관한 것이다.

또한 마니아를 제외한 김기덕 영화의 옹호자들은 예술영화와 실험영화의 선호도가 일반관객에 비해 현저히 높게 나타났다. 특히 예술영화에 대한 선호도는 기타집단에 비해서 다섯배가량 높았고, 장르 중에선 공포와 스릴러에 많은 답이 모아졌다. 결국 문화적 취향이 세련되고 리버럴한 소수가 김기덕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영화를 선택할 때도 감독과 내용을 가장 크게 고려한다고 답합으로써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관객임을 입증했다. 이들의 판단에 따르면 김기덕 감독은 비주류/아웃사이더영화에 속하며(49.8%) 혹자는 예술/작가영화(21.7%)의 범주에 넣기도 했다. 한편 김기덕을 싫어한다고 답한 관객 가운데 그의 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가 어려운 영화이기 때문(25.8%)이라고 답했다. 보통 예술/작가영화가 가지는 소통상의 어려움이 김기덕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한국영화 감독들의 예술가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선 마니아들은 당연히 김기덕을 응원했지만, 일반관객 가운데 김기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창동을 1위에 올려놓았다. 조사자들은 여기서 장선우가 10위 안팎을 오간 결과는 두고, 김기덕과 장선우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유사성을 강조하는 건 관객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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