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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퀴어 코드를 찾아서

한 남자가 한 남자를 꼬신다. 그것도 얼굴을 맞대고.

먼저 꼬심을 당하는 남자가 근심어린 얼굴로 말문을 연다. “괜찮을까”. 단호한 표정으로 꼬시는 남자가 대답한다. “더 좋아.”

잠시 두 남자 사이에 설왕설래가 이어진다. 마침내 꼬심을 당하던 남자는 결심을 굳히고, 환한 얼굴로 묻는다. “바꿀까?” “기회야.”

두 남자를 클로즈업했던 카메라가 빠지자 꼬심을 당하던 남자가 철장에 갇혀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가 철장을 훌쩍 뛰어넘어 꼬시던 남자 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두 남자가 머리를 비스듬히 맞대며 환한 미소를 짓는 헤피엔딩. 이들을 축복하는 마무리 자막이 뜬다. ‘have a good time’.

어라, 좋은 시간을 가지라고? 남자 둘이서? 때맞춰 “굿타임 찬스”라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바꿀 기회”라니. 무엇을 바꿀 타임? “괜찮을 뿐 아니라 더 좋다”니. 뭐가 더 좋다는 거지? 더구나 근심말고 넘어 오라니. 이성애에서 동성애로? 이건 완전히 커밍아웃하라는 거군. 철창을 나오자(coming out) 저토록 행복해하다니. 이건 15초짜리 퀴어드라마다. 선남선남(김민준과 유진)을 캐스팅한 초절정 퀴어 광고다. 마지막의 KTF 로고만 없으면, 번호이동제 광고라는 컨셉만 지워버리면.

하긴 중간에 분위기 깨는 설왕설래도 있다. “전화번호는?”, “그대로야”, “단말기 값은?”, “걱정마”. 그러나 그 깨는 말조차 ‘서글픈 유혹’의 은유로 들린다. 그 은유를 퀴어적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내 삶은?”, “그대로야”, “희생은 없을까?”, “걱정마”.

자, 사시눈을 뜨고, 억하심정을 억누르지 말고, 텔레비전 속에 숨어 있는 1인치를 찾아보자. 이따금씩 광고에서, 엉뚱한 드라마에서 숨겨진 동성애 코드를 찾는 재미는 쏠쏠하다. 어떤 사람들은 <순풍산부인과>의 권오중과 이창훈을 게이 커플로 ‘단정했다’.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둘 사이가 장난이 아니다. 일단 둘은 한 지붕 아래 동거한다. 날마다 붙어다닌다. 여자들과 어울릴 틈도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날마다 티격태격이다. 이 티격태격은 형, 동생 사이를 가장한 사랑 싸움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오중이는 창훈이가 조금만 소홀하면 금방 삐친다. 오중이는 또 영란(허영란)의 집요한 구애를 한사코 마다한다. 마침내 이 커플은 오중이의 조카 의찬이까지 키우며 ‘대안 가족’을 완성했다. 물론 이창훈이 호감을 갖는 혜교(송혜교)처럼, 건강 사회와 건전 시민을 위한 ‘안전장치’도 없지는 않았다.

<대장금>에서 장금이의 단짝으로 나오는 연생이(박은혜)의 캐릭터에도 레즈비언 코드가 숨어 있다. 연생이는 장금이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꼭 장금이 옆에서 자려고 한다. 그런데 잠만 자는 것이 아닌 게 문제다. 연생이의 ‘손버릇’은 나인 동기인 영로의 말로 탄로난다. 최 상궁의 밀정으로 장금이 방으로 거처를 옮긴 영로. 영로는 이부자리를 내려놓고 연생이를 째려보며 “너 내 몸 더듬거리며 죽어”라고 커밍아웃시켜버린다. 그 전에도 장금이가 잠결에 자신을 더듬거리는 연생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애틋한 장면이 나왔다.

장금이에 대한 연생이의 연모의 정은 여고 시절 반 친구에게 집착하는 소녀적 동성애를 떠올리게 한다. 푼수인 연생이는 장금이뿐 아니라 수라간 최고상궁이었던 정 상궁에게도 의지해 하루하루를 헤쳐간다. 그랬던 연생이가 임금의 ‘승은’을 입었다. 연생이의 팬으로 감축드려야 마땅하나 그의 성 정체성이 훼손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대장금> 초반부에는 동성애를 뜻하는 ‘대식’이라는 말이 나온 적도 있다. 장금이와 그 동기들이 생각시에서 나인으로 승급하던 날, 훈육상궁이 나인들을 모아놓고 궁중생활의 ‘가이드 라인’을 알려주었다. 그중에 “대식을 하지 말 것이며”라는 구절이 나왔다. 대식이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여성 동성애를 일컫는 말이었다. 마음 약한 연생이가 얼마나 찔렸을까? 돌아보니 가슴 아프다.

그뿐이 아니다. “난 네가 필요해”, “나는 너와 함께 있으니 외롭지도 춥지도 힘들지도 않구나”. 이 절절한 대사는 민정호(지진희)가 장금이에게 한 것이 아니다. 한 상궁이 장금이에게 쏟아낸 고백이다. 역시 사시눈으로 보면, 장금이와 한 상궁의 자매애도 심상치 않다는 오해를 할 만하다. 이런 절절한 대사와 넘쳐나는 자매애 탓에 <대장금>은 레즈비언들 사이에서 초절정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대략 황당하다고?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좀 삐딱하게 텔레비전을 보면, 비싼 돈 들이지 않고도 숨어 있는 1인치를 찾을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상상하는 만큼 즐거운 법이다. have a good time.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