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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말죽거리 잔혹사>

1978년, 이소룡을 숭배했던 고등학생들의 성장담. 폭력과 남성성에 대한 비판과 젊은 날에 대한 그리움이 공존하는, <비트>와 <질투는 나의 힘> 사이에 위치한 청춘영화.

성장은 고통이다. 상상 속에서 소년은 영웅이지만 거울에 비친 나는 한없이 초라하다. 그 불일치를 감당할 수 없기에 아프고, 아픔을 잊기 위해 더욱더 초인의 환상에 집착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 시절의 기억으로 이뤄진 영화다. 1978년, 소년들의 영웅은 이소룡이었고 폭력은 매일 반복되는 일과였다. 선생님은 폭언과 구타를 가르쳤고, 학교는 권력의 발바닥을 핥았으며, 아이들은 주먹질로 그들만의 서열을 만들었다. 그때를 어떻게 견뎠던가? 가능한 유일한 길은 수컷이 되는 것이었다. 맞기 전에 선방을 날리고 모욕을 당하기 전에 욕설을 뱉어라. 불의에 맞서기 위해 남자가 돼야 했던 한 소년의 성장기, <말죽거리 잔혹사>엔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쓴 청춘에 대한 헌사와 흉포한 남성성의 근원을 파고드는 냉정한 고발이 나란히 들어 있다. 그리고 둘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 <말죽거리 잔혹사>의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다.

이 영화는 <비트>나 <친구>처럼 남자 고등학생들의 폭력세계를 다룬 이야기지만 사내들의 의리와 우정을 찬양하는 영화는 아니다. 주인공 현수는 <비트>의 정우성보다 <질투는 나의 힘>의 박해일을 닮았다. 그 시절 또래라면 누구나 그랬듯 이소룡을 우상으로 여기는 17살의 모범생 현수는 새로 전학간 말죽거리의 고등학교에서 우식이라는 친구를 만난다. 선배들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싸움꾼 우식은 <비트>의 한마디로 정우성 같은 인물이다. 남성적 폭력질서의 맨 꼭대기에서 그는 현수가 선망하고 질투하는 모든 능력을 갖고 있다. 우식은 <비트>의 정우성인 동시에 <질투는 나의 힘>의 문성근의 자리에 있는 인물인 셈이다. 우식이 결정적으로 이런 위치에 서는 계기는 이웃 여고생 은주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면서다. 어느 날 버스에서 학교 선배들에게 희롱당하는 은주를 구해주면서 우식은 은주의 마음을 얻는다. 싸움에서도 연애에서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수, 그의 열패감은 현수를 폭력의 자장으로 끌고가는 동력이 된다. 우식이 학교의 라이벌인 선도부장 종훈에게 지고 학교를 떠난 뒤 현수는 제2의 우식이 되기로 결심한다. 현수와 종훈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전학간 학교에서 만난 우식은 현수에게 있어 이길 수 없는 인물이다. 현수가 짝사랑하게 되는 은주와의 관계에서도,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현수는 알게 모르게 우식에 대한 열패감에 시달린다.

전작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캐릭터를 세공하는 기술을 보여준 유하 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도 캐릭터로 끌고가는 영화로 만들었다. 권상우가 연기한 현수는 여리고 수줍은 소년의 이미지로 안쓰럽고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정진이 맡은 우식은 거침없이 질주하는 반항아의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그들은 상반된 쌍이지만 영화는 그렇게 대조적인 두 사람이 실은 비슷한 소년일 뿐이라는 점도 놓치지 않는다. 우식이 학교를 떠날 때 뒤돌아선 모습은 현수의 실연만큼 가슴 아프고 현수의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은 우식의 반항 이상 짜릿하다. 거꾸로 우식이 사랑하는 여자를 모욕할 때 드러내는 비열함은 현수가 쌍절곤으로 상대의 뒤통수를 칠 때 보여주는 잔인함과 다르지 않다. 영화는 그들이 닮은 이유를 잘 안다. 현수와 우식의 관계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면 학생의 인격을 걸레 취급하는 선생님들이 있고 불합리와 불의를 조장하는 학교가 있다.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비겁한 어른들을 닮아가거나 폭력에 호소한다. 그렇지 않은 인물,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유급생인 찍새는 선생과 학생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내쫓기는 아이들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 아니라면 포착하기 힘든 인물을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여럿 만날 수 있다.

유하 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를 만든 계기로 자신의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와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를 들었다.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에 기록된 17살 자신을 매료시켰던 영화와 노래에 대한 절절한 향수가 이 영화의 한축이라면 <69>에 표현된 학교와 선생에 대한 분노는 또 다른 축이 될 것이다. 이것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만들었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적인 태도, 도발적 캐릭터를 내세우면서도 유하 감독은 장르의 약속이 만드는 환상과 노스탤지어를 버릴 수 없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안티히어로의 근사한 판타지가 이뤄지는 지점에서는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을 거두는 타협책을 취한다. 아마 <말죽거리 잔혹사>는 이소룡의 영화와 진추하의 노래를 보고 들으며 자란 세대에게 더 각별한 느낌을 주겠지만 1978년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20년 넘는 시간이 흘렀어도 바뀌지 않는 교실의 풍경, 거짓과 위선을 배우며 자라는 학생들의 표정, 이소룡 세대가 중년이 됐지만 그런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말죽거리 잔혹사>를 노스탤지어에 기댄 청춘영화로만 규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 그래!”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전하는 소름끼치는 카타르시스, 이 영화는 그것만으로도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기에 충분한 자질이 있다.

얼굴은 리틀 유오성인데? <말죽거리 잔혹사>의 조연배우들

박효준

이종혁

권상우, 이정진, 한가인, 세 주연배우 외에도 <말죽거리 잔혹사>에는 돋보이는 조연들이 여럿 있다. 현수의 짝인 햄버거는 영화에서 가장 코믹한 인물이면서 학생들의 권력관계에 민감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교내에서 포르노책을 유통하는 그는 힘을 가진 편에 빌붙는 처세술을 일찍 터득한 인물이지만 친구가 곤경에 처했을 때 모른 척하는 비겁한 인물은 아니다. 등장인물 중 그누구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밀어넣지 않는 감독의 시선이 느껴지는 캐릭터. 햄버거를 연기한 박효준은 오디션에서 발굴된 신인배우. 우식의 라이벌인 선도부장 종훈은 자신에게 고개숙이지 않는 우식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인물.

종훈을 연기한 이종혁은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으로 <의형제> <오! 해피데이> 등의 뮤지컬, 연극에 출연한 경력이 있다. 2001년 서울공연예술제에서 신인연기상을 타기도 한 그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이루는 연기조화의 결정적 매듭 하나를 제대로 엮어냈다.

현수 반의 유급생 찍새는 <송어> <박하사탕> <조폭마누라> 등으로 낯익은 김인권이 맡았다. 찍새는 이 영화에서 다소 독립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는 인물로 학교가 평균적인 인간만을 위한 체제임을 폭로하는 기능을 한다. 찍새는 화가 나면 친구의 머리를 볼펜으로 찍어버리는 행동을 하는데, 같은 폭력이지만 찍새의 이런 행동은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아마 그 이유는 이런 반칙을 용인하면 싸움꾼의 서열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밖에 현수를 유혹하는 분식집 아줌마로 나온 배우는 <애마부인3>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의 김부선이며 학생들의 담임선생님으로 나온 배우는 <오아시스>에서 설경구의 형으로 나왔던 안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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