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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함과 전통의 그늘 사이, <브라더 베어>

참신함과 전통의 그늘 사이 경계에 어정쩡하게 멈춰선 <브라더 베어>는 지극히 사랑스럽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상투성으로 충만하다

아득한 옛날의 북미 대륙. 부족 무당 타나나는 소년 키나이에게 토템 의식을 치러주며 삶의 징표로 ‘사랑’을 의미하는 곰의 토템을 건네준다. 내심 형들처럼 용감한 독수리나 늑대 같은 토템을 바라고 있던 키나이는 실망한다. 얼마 뒤 물고기 바구니를 훔쳐간 곰을 뒤쫓던 키나이는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고, 그뒤를 쫓던 큰형 시트카는 동생 대신 곰과 맞서다 죽음을 맞는다. 죄책감과 분노에 북받친 키나이는 곰의 토템을 내팽개친 채 끝끝내 형을 죽인 곰을 없애는 데 성공한다. 그 순간 오로라의 형태를 한 정령들이 키나이를 곰으로 바꿔버린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둘째형 데나히는 동생마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곰에게 복수를 맹세한다. 자신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는 키나이는 길 잃은 아기 곰 코다와 함께 정령들을 만날 수 있는 산을 찾아 떠난다.

거의 확실하게 디즈니의 마지막 셀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될 <브라더 베어>는 스타일상의 놀라움과 내용상의 낯익은 진부함이라는, 디즈니가 최근 처한 딜레마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의 스타일은 셀애니메이션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최대한 확보하는 놀라운 경지이다. 키나이가 인간일 때까지, 즉 전체 러닝타임의 1/3에 이르기까지 창백한 회색과 다소 어두운 갈색 톤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지만 키나이가 곰으로 변하면서부터 화면은 완전히 달라진다. ‘곰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이라는 컨셉으로 이뤄진 이후의 장면들은 이전의 스탠더드 포맷에서 벗어나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로 바뀌면서 놀랄 만큼 생생한 원색과 드라마틱한 빛의 조화로 마치 춤추듯 진행된다. 곰이 된 자신을 깨닫고 놀란 키나이가 물속에 빠지는 해저장면, 투명한 얼음 동굴, 화산 지대의 분출하는 용암, 수많은 색채들의 음영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오로라 등은 3차원의 대자연을 2차원에서 선과 면의 분할만으로 표현하기 위해 도전했던 애니메이터들의 승리라 보아도 무방하다. 곰과 순록, 맘모스, 연어 등 동물 캐릭터들의 숨가쁘게 쾌활한 움직임과 더불어 <브라더 베어>의 압도적인 자연 풍광은 이제껏 <라이온 킹>을 비롯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없었던 사랑스러운 로코코풍의 화려함과 시각적 즐거움을 최대한 만끽하게 한다.

하지만 내용으로 들어갈 때 <브라더 베어>는 거북스러운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라이온 킹>이 제작 단계에 있을 무렵, 사자에 이어 곰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동시에 진행키로 결정한 디즈니 스튜디오에서는 아메리카 네이티브 원주민들의 설화를 바탕으로 <브라더 베어> 프로젝트에 착수하였다. 동물이 인간으로, 인간이 동물로 바뀌는 것은 단지 ‘옷을 갈아입을 뿐’이라는 원주민들의 자연친화적인 변형 설화는 <햄릿>식의 첨가물(형의 영혼에 사로잡힌 동생)과 함께 익숙한 성장 스토리로 재탄생했다. <브라더 베어>에서 가장 자주 되풀이되는 단어는 ‘man’이다. You will be a man. 여기서의 man은 강인함과 용기, 성숙과 관용까지 겸비한 지도자로서의 ’남성 어른’인 인간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키나이는 죽은 형의 그림자에서부터 벗어나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겸손함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아야 하는 사랑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키나이의 변형은 북미 대륙의 선조 중 한명인 그 자신의 운명을 위해서라도 필연적이다.

알키나이는 아기곰 코다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인간이 보는 것보다 더 넓은 세상과 자연을 만난다.

이건 어딘지 이상하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한 이후 몇 백년이 흘렀다. 원주민들의 잊혀졌던 이야기는 이제 백인들의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에 효과적인 소재라 판단되어 아름답고 웅장한 음악과 적절한 코믹함과 감동의 배합으로 포장된 채 전세계에 진열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이 된 데나히가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오프닝 장면, 부드럽게 웅얼거리던 원주민 언어가 어느새 영어로 더빙되며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던 그 장면은 단순한 효과일 뿐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묘한 기시감을 안겨준다. 게다가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이야기하는 감동적인 설교에 이르면 현재 중동 지역을 초토화시킨 미군의 당당한 위용이 겹쳐지면서 참을 수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건 틀림없지만, 어쩔 수 없이 이전작 <포카혼타스>의 시선과 비슷한 함정에 빠져버리게 된 건 아닐까. 분명 네이티브들이 현재 미국인들의 조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제 아메리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차이를 동일화시킴으로써 애니메이션이라는 달콤한 문화상품을 통해 인류 보편의 자산으로까지 승화시키려는 캐주얼한 역사 감각 말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일한 주제에 대해 공적인 입장과 문화적인 입장이 이토록 상반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게 ‘당연한’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3D의 성공, 셀의 몰락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최근 경향

최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경향을 정리한다면 자신들의 계보를 스스로 인용하기와 이제까지의 소재의 원천이었던 동화에서 벗어나 각종 신화와 전설들을 차용하는 것, 그렇게 이중의 패스티시로 비슷한 작품들을 연달아 생산한다는 점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디즈니가 오랜 침체기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인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가 놀라웠던 건 ‘그들의’ 이야기인 서양 고전동화들을 새롭게 재각색하여 현대적인 감각과 팝 컬처의 표현 양식을 덧붙였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디즈니의 전략은 고전과 현대 양쪽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단지 ‘동화’에만 소재를 국한시키지 않고 신화나 전설을 현대적으로 채집하는 쪽으로 나아갔으며(그것의 형식은 대개 2D 셀애니메이션이었다), 나머지로는 픽사와 함께 손잡고 3D애니메이션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나가는 것이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었던 공통점은 ‘새 술에 새 부대를’이라는 속담이 그리 틀린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디즈니의 최근 셀애니메이션들은 단연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들이 집결함으로써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셀애니메이션의 한계를 매번 뛰어넘는 듯한 형식적 완성도를 보여주었으나 정작 내용은 점점 진부해졌던 것이다. 아니, 좀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정통적인’ 가족 애니메이션의 틀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라이온 킹> <뮬란>이나 <포카혼타스> <타잔> <다이너소어>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 등을 떠올려보라. 반면 셀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신화나 전설의 익숙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재에 도전했던 <쿠스코? 쿠스코!>와 <릴로&스티치>가 거둔 작은 성공, 그리고 픽사와의 협업으로 만든 <토이 스토리>와 <니모를 찾아서>의 참신함은, 디즈니가 자신들에게 지나치게 무겁게 드리워진 ‘온 가족 시청용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익숙한 테두리에서 약간의 변형을 시도함으로써 애니메이터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때, 비로소 좀더 훨씬 흥미로운 도전이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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