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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징’하다

어떤 사람들에게 피는 물보다 ‘징’하다. KBS2 수·목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는 징한 콩가루 집안 이야기다. 이 집안의 내력은 아버지 김두칠(주현)이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타박하는 대사에 요약돼 있다. “집안꼴 잘돼 간다… 큰 딸년은 이혼하고, 둘째 딸년은 천하에 저밖에 모르게 키우고, 아들놈은 주먹질이나 해서 감방 들락거리고…. 애미가 돼가지고 밥만 잘하면 뭐해….” 참, 이토록 당당한 아버지는 젊은 여자하고 바람나서 딴살림을 살고 있는 중이다. 피가 물보다 ‘징’하지 않을 수 없는 내력이다.

이 콩가루 집안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지켜온 것은 억척스러운 큰딸과 바보 같은 어머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바보 같은 여자’들에게 바치는 꽃다발이다. 어머니 이영자(고두심)는 가족들에게 ‘바보 같은 사랑’을 베푼다. 남편이 가정을 버려도,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베풀고 또 베푼다. 어머니에게는 오직 그 사랑만이 ‘내가 사는 이유’다. 큰딸 미옥(배종옥)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처연한 자문 대신 사랑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간다. 이토록 비현실적인 ‘설정’을 노희경은 가슴에 와닿는, 눈물을 빼내는 이야기로 만든다. 하긴 우리 현실이, 우리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그토록 비현실적인 탓도 크다. 물론 가시없이 폐부를 찌르는 대사와 오버하지 않고 허를 찌르는 설정도 죽인다.

<꽃보다 아름다워>에는 노희경표 가족드라마의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우선 노희경의 가족드라마는 ‘성차별적’이다. 그는 아버지 세대와 딸 세대의 남녀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서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그의 드라마에서 아버지 세대의 남자들은 대개 강하다. 그들은 그 강인함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거나 가족들을 버린다. 남자들의 강인함은 폭력에 가깝다. 아버지 김두칠이 그러하다. 반면, 그 세대의 어머니들은 대개 연악한 존재들이다. 딸 세대로 오면 남녀 캐릭터는 뒤집어진다. 딸 세대의 여성들은 강하다. 그들은 그 강인함으로 버림받은 가족들을 추스르고 먹여살린다. 미옥의 예가 그러하다. 반면 남성들은 허약한 존재들이다. 미옥의 동생 재수(김흥수) 등이 그러하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여성 친화적이어서, 매우 성차별적이다. 이 엇갈린 시선에서 나쁜 남성 가부장과 착한 여성 가부장이라는 이중권력 상황이 나오고, 두 가부장의 충돌은 드라마의 한축을 이룬다. <꽃보다 아름다워>에서는 제삿날, 두 가부장이 상을 엎으며 싸우는 장면에서 이런 갈등이 드러난다.

노희경의 여성관은 촌스러운 구석도 있다. 노희경은 사랑받는 여자란 모름지기 ‘살갑고 여우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니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애교를 떨었으면 미쳤다고 내가 나가서 사느냐”고 쏘아대는 장면이 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자기변명 속에도 묘한 진정성이 담겨 있다. 그의 드라마에서 남편에게 버림받는 여자들은 한결같이 곰 같거나 드세거나 그렇다. 그래서 노희경의 여성관은 답답한 구석도 있다.

그런데 이 답답한 여성관이 짜증나지가 않는다. 그 착한 여자들을 보고 있지만, 나도 절로 착해져서 그 여자들과 함께 울게 된다. 아버지가 다녀간 날, 어머니가 혼자 거울 앞에서 “여보, 내가 그렇게 여자 같지 않았어? 나도 이쁘게 웃을 수 있는데…”라고 처연하게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눈물짓지 않을 수 없다. 시아버지 제삿날, 남편과 자식들이 대거리를 하지 않을까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착한 여자를 연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여자를 생각하면 자꾸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고여서 글을 써내려 가기 어려울 지경이다.

일요일 저녁, 회사에서 인터넷으로 이 드라마를 보면서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엄마랑 놀아줘야겠다’, ‘혼자 계신 어머니한테 남자친구라도 소개시켜줘야겠다’는 반성과 다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 드라마 홈페이지에 떠 있는 “‘공영’ 방송 드라마로서 역할을 다하겠다”는 제작 취지가 십분 만족된 것이다. 어머니 있는 자, 수요일과 목요일 밤 10시면 <꽃보다 아름다워>를 틀어라!

추신. 친구가 아프리카로 떠난다. 아프리카 오지의 에이즈병원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러 간다. 그 친구는 아주 뛰어난 동성애자인권운동가다. 그는 오래전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지만, 가족의 강권으로 결혼까지 해야 했다. 인권운동하는 놈이 ‘오죽하면’ 결혼까지 했겠는가? 그 친구도, 그 친구의 어머니도 모두 가련한 피해자들이다.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의 신음소리만 도처에서 들려온다. 그것이 이땅의 가족주의다. 기가 막힌다. 내일이면 친구가 떠난다.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신윤동욱/ <한겨레>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