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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곤경 속에서 되찾는 미소의 깨달음, <미소>

삶의 곤경속에서 되찾는 미소의 깨달음.

박경희의 장편 데뷔작 <미소>는 감독 임순례가 프로듀서를 맡고, 또 한명의 감독 송일곤이 남자 주인공 ‘지석’으로 등장하며, 기성 배우 추상미가 노 개런티를 선언하면서 마침내 완성된 영화이다. 현재 블록 버스터를 향한 영화적 ‘튜블러 비전’을 앓고 있는 한국영화의 명단 사이에 이 영화가 끼어 있다는 것은 지난한 싸움 끝에 이른 등재라는 사실을 예측하고도 남기 때문에 우선은 즐거운 출현이다. 그 점에 대해 화답하듯 몇몇 국내외 영화제들은 수상과 초청이라는 형식을 빌려 지지를 보냈다.

<미소>는 이미 영화를 본 몇몇 관객의 입소문이 들려주는 것과는 달리 여성의 문제에 치열한 초점을 맞추고 있거나 일상성의 테마로 채워져 있지 않다. 의외로 <미소>는 너무 초연하기 때문에 야심적으로 보이는, 더러는 너무 본질적이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보이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 ‘눈’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단지 효과가 아니며, 유인원과 분자생물이 끼어드는 것은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방점 그 이상을 넘어선다.

<미소>는 질문을 시작하기 위해 주인공 ‘소정’에게 장애를 부여한다. 첫 번째 장, ‘튜블러 비전’. 점점 더 시각이 좁아져 마침내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는 그 병은 사진가인 그녀에게 치명적이다. 소정은 의지를 잃고 분자생물학도인 남자친구 ‘지석’과 함께 가기로 했던 유학길도 포기한다. 그 즈음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두 번째 장, ‘가족’. 할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소정이 머무르는 그 집안은 휴식처가 아니라 무덤이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어머니와 그저 앉아서 트로트를 들으며 술만 마시는 아버지, 그리고 분열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의 오빠. 소정은 그곳에서 ‘우연히’ 나무가 박혀 있는 조부의 무덤을 발견한다. 세 번째 장, ‘미소’. 사진 촬영을 위해 경주로 간 소정은 1500년 전의 고분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벽화의 그림이 비상하는 환상을 경험한다. 네 번째 장 ‘비행’. 소정은 경비행기를 배우기 위해 벌판을 찾는다. 교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는 비행기를 몰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비행기는 추락하고 소정은 물에 잠긴 비행기의 한쪽 날개에 간신히 몸을 유지한다.

소정에게 부여된 질병은 존재론적인 질문을 마주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로서 찾아온다. 바꿔 말해 육체의 시야가 좁아지는 병에 걸리면서 삶의 시야를 넓혀볼 수 있는 역설적인 경험을 갖게 된다. 통과의례와도 같은 네개의 장을 거치면서 <미소>에는 모호한 것과 명확한 것, 작은 것과 큰 것, 가까운 것과 먼 것 사이의 연관이 형성된다. 소정과 지석이 헤어지기 전 둘의 첫 만남을 돌이키면서 그 ‘절묘한 우연’을 운명이라 부를 것인가 ‘우연의 일종’이라 부를 것인가를 놓고 싸우는 장면은 소정이 만나게 되는 영화 속 철이와 숙이 커플의 사연에 이르러, 그리고 이후 기차 안에서 과일을 깎는 그 ‘칼’에 이르기까지 미완의 문제제기를 연장한다. 또는 조부의 무덤에 박혀 있던 나무와 나무가 박혀 있는 옛 고분을 마주하면서 미시와 거시의 유사적인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또, 어머니가 신봉하는 미신(또는 손금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타인의 믿음)과 남자친구가 믿어 의심치 않는 분자의 과학성이 서로 겹치며 ‘알 수 없음’의 한 사례가 된다.

소정은 유물들을 사진에 담으며 불안을 떨치려 한다.

말하자면, <미소>에는 대비되는 것들에 대한 성찰이 깃들어 있다. 서산대사의 혜안과 개체의 합리성을 같이 생각하고자 하고, 미신과 과학을 동일한 의문으로 묶기도 한다. 운명을 정의해보려고도 하고, 사적인 가족의 무덤과 역사적인 유물로서의 무덤을 연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광의의 연관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다시 귀착하는 현재는 혼자이다. 그런데, <미소>는 영화가 묶어놓은 이 연관들을 더이상 밀고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건 실수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사유를 영화의 형식으로 바꾸면서 드러난 창작자의 버릴 수 없는 수사적 인격화의 과정에 가까운 것 같다. 안과 바깥이 통풍되는 사유가 있는데, 그와는 상관없이 표면에서 표면으로 흐르는 무심한 일상적 요소들이 그 사유에 대해 봉사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미소>는 이 두 가지의 지향을 모두 담으려 한다. 하지만, 양파의 껍질을 벗겨내듯 차근차근 진통을 알아가는 이 영화의 형식상 두 지향이 조화롭게 만나기 위해서는 더 긴 러닝타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혹은 그 반대로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을 버릴 수 있는 과감한 생략과 압축이 더 필요했을지 모른다. ‘삶의 불가해성’이라는 화두에 대한 더욱 친절하고 구체적인 질곡들이 그 안에 있어야 했거나, 과감한 압축의 형식 내지는 형식의 도약이 필요했던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불가해성을 앞에 두고 참 알 수 없다고 결론짓고 뒤돌아서는 것은 그 의미를 소진시키기 때문이다. 해답은 관객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출현의 의의조차 부정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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