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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확신, <곰이 되고 싶어요>
심은하 2004-02-12

아가씨 <곰이 되고 싶어요>를 보고, 코를 훌쩍이며 ‘곰 소년’을 처연하게 바라보다

“어제 저녁 청계산으로 달아난 늑대를 잡기 위한 포획작전이 계속되고 있지만 늑대는 요리조리 포획망을 따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뉴스를 들으면 난 광분한 나머지, 달아난 동물이 잡히지 않길 기도한다. 짠한 건 늑대가 아니라 늑대를 무서워하는 우리가 아닐까. 늑대는 인간만을 두려워하지만, 우린 계산될 수 없는 모든 존재들을 두려워하잖아. 애완동물에겐 간도 쓸개도 내주면서 야생동물에겐 총알부터 갈기도록 길들여진 우린, 예측불가능한 모든 것에 공포를 느끼도록 조련된 걸까. <곰이 되고 싶어요>에 코를 훌쩍이면서도, ‘곰이 된 소년’을 처연하게 바라보는 한 조각 의혹은 뭘까. 난 아직도 ‘암만 혀도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젤이여!’라는 무서운 믿음을 버리지 못했구나. 나를 인간으로 가두는 힘센 그물들에 놀라 움찔, 닭살이 끼친다.

‘인간아빠’가 찌른 작살로 ‘곰엄마’를 잃은 뒤, 곰-소년은 인간의 문명에 던져진다. 광포하게 질주하는 자동차, 셋만 모여도 하나를 왕따로 만드는 끔찍한 놀이문화. 그는 자신에게 덧씌워질 인간의 영혼이 두렵다.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한 자만이 곰이 될 수 있다. 첫 번째 문턱은 거대한 해협. 수염고래는 분노한 바다에 저항한다. “넌 너무 잔인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도와줘야해.” 두 번째 문턱은 거센 북풍.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사람은 도와야 한댔어.” 진노한 북풍의 저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소떼는 소년을 에워싸며 바람막이가 된다. 마지막 문턱은 고독. 저만치 앞에는 가장 행복했던 기억, ‘곰엄마’의 뒷모습이 있다. 바로 뒤에는 가장 공포스런 기억, 이빨을 드러낸 늑대의 추격. 이제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다. 우렁찬 울음을 토해내며 발길질로 늑대를 물리치는 건, 항상 소년을 지켜주던 엄마곰이 아니라 소년, 아니 이제 곰이 된 자신이다. 곰-소년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인간엄마와 인간아빠. 그들은 연인을 잃고 슬피 우는 곰-소년의 몸짓을 읽어낸다. “살아 있는 것은 사슬이 아니라 사랑으로 붙드는 거지. 떠나거라, 얘야.”

이만하면 웅녀의 사람 되기보다 사람의 곰 되기가 몇 만배 힘들지 않은가. 단군신화는 홍익인간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를 가르친 건 아닌지. 당최, 곰이 뭐가 부족해서 인간이 되겠다고 용을 쓸까. 마늘이랑 쑥, 계속 먹으면 좀 물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보양식’ 아닌감. 털도 발톱도 용맹도 없는 인간이 어떻게 해협을, 북풍을, 게다가 가장 끔찍한 고독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토록 아름다운 곰을 ‘미련 곰탱이’라는 불경스런 언사로 모욕하다니. 불가능에 도전하는 친구를 도와준 기억도, 또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존재를 걸 용기도 아스라한 나. 다행히 ‘곰스런’ 친구는 알고 있다.

대책없는 호기심이 타인의 상처가 됨을 몰랐던 아홉살의 난, 물었다. “삼촌도 걷고 싶지?” ‘1급 장애인’이었던 삼촌은 엷게 웃었지. “그래. 걷고 싶다.” 하늘이 내게만 쏟아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 때마다, 떠오른 건 위대한 예술가나 혁명가가 아니라 삼촌이었어. 삼촌, 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존재의 집을 허물고 이곳을 떠날 때, 내 싸늘한 시신 곁에서 심장이 마르도록 울어주는 친구가 그토록 많은. 난 이렇게 잘 걸을 수 있는 걸로도 모자라, 이렇게 먹고 싶은 음식도 가고 싶은 곳도 많은데, 삼촌은 무슨 배짱으로 아프다는 말 한번 않고 우릴 떠났어? 삼촌, 언제부터 내 꿈은 고작 마감 잘 지키는 글쓰기 기계로 닫혀버렸을까. 삼촌, 나 이제 꿈을 조금만 더 크게 가져도 될까. 이젠 이런 것들이 되고 싶어. 너의 젖은 눈시울을 말려주는 따스한 햇살 한 줄기. 탁해진 머릿속을 헹궈주는 맑은 바람 한 자락. 네 입속으로 들어가, 네 타는 목마름을 어루만지는 맑은 술 한 모금. 삼촌, 거긴 어때? 참한 여자 많우? 거기선 맘껏 사랑할 수 있는 거지?

정여울/ 미디어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