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영화사 신문 제31호 (1972∼1974년)
김재희 2004-02-12

뉴 저먼 시네마 ‘활짝’

파스빈더, 헤어조크, 벤더스 ‘3인방’ 작품 눈길, 자금흐름도 숨통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아귀레, 신의 분노>

<도시의 앨리스>

파스빈더, 독일 사회의 부조리와 편견을 멜로와 접목

뉴 저먼 시네마의 핵심 기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Reiner Werner Fassbinder)의 신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가 지난 3월 개봉했다. 이 영화는 더글러스 서크 감독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1955)에서 주요 모티브를 빌려온 것으로 알려진다. 파스빈더가 미국의 멜로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뉴 저먼 시네마의 가히 전설적인 흥행부진과 비대중성 때문. 고민 끝에 그는 서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50년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양식을 70년대 서독사회의 모순을 그리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크의 영화에서 젊은 남자 정원사와 중산층 미망인과의 사랑이 파스빈더에 와선 젊은 모로코 기계공 남자와 청소부인 나이든 독일인 과부와의 사랑 이야기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계급문제에서 인종문제로 갈등의 초점이 바뀐 것. 파스빈더 역시 멜로드라마 형식을 빌려 사회에 팽배한 편견과 문제점을 풀어가고자 했다. ‘라인강의 기적’에서 이어지는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던 60년대의 서독은 많은 외국인 노동자- 주로 모로코, 터키 등 인접한 아랍권 나라의- 들을 ‘수입’하여 최하층의 노동력으로 사용하였다. 이 작품은 이러한 현대 독일의 노동계급 문제를 다루면서 인종과 세대 그리고 성차의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

줄거리는 모로코 기계공 알리와 청소일을 하는 연상인 과부 에미가 자신들을 둘러싼 편견과 비방을 딛고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해 결혼하기에 이른다는 것. 이들의 ‘있을 수 없는’ 결합에 대한 ‘보통 독일 사람’들의 반응을 차분하게 묘사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삶이 어느 정도까지 성, 사회적 지위, 인종, 계급이라는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가를 드러낸다. 고통스러울 만큼 정직하게 문제의 핵심을 직시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엘 헤디 벤 살렘과 브리지트 미라가 각각 열연했다.

헤어초크, 벤더스의 자기반성적 신작들

스필버그, 루카스, 코폴라가 엄청난 스펙터클로 관객을 압도한 것처럼 유럽의 감독들은 아름답고 놀라운 영상으로 관객의 시선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뮌헨에 근거를 둔 두 감독인 베르너 헤어초크(Werner Herzog)와 빔 벤더스(Wim Wenders)는 이러한 경향을 보인 대표적 감독들. 영상의 아름다움과 관객의 감수성을 신뢰한 그들은 다른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의 정치적 관심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의 자기반성적인 영화는 또한 이 시기 독일 문학의 ‘새로운 내면성’(new inwardness)의 경향과 맞닿아 있다.

헤어초크는 1972년 <아귀레, 신의 분노>(Aguirre, the Wrath of God)로 고도로 낭만적인 감수성을 가진 감독이라는 평을 얻었다. 전설 속의 ‘황금도시’ 엘도라도를 찾아나선 스페인 무사들의 이야기를 그는 실제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아마존의 정글에서 악전고투 끝에 찍어냈다. <조각가 스타이너의 황홀경>(1974)과 같은 자신의 기록영화에서조차 경험의 직접성과 지각의 순수성을 포착하려고 했던 그였다. “영화는 분석이 아니라 마음의 선동”이라고 믿었던 헤어초크는 <아귀레…>에서 주기적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듯 굽이치는 거친 아마존강을 비췄다. 언어를 뛰어넘는 신화적인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순수한 영상에 몰두한 것이다.

벤더스 역시 유사한 반(反)서사적인 충동으로 영화제작에 임했다. 헤어초크가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면, 벤더스는 로큰롤 및 할리우드영화들에서 심미적인 즐거움을 찾아냈다. 1973년작 <도시의 앨리스>에서 그는 멀리서 잡은 풍경과 침묵 등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의 방랑을 강조하는 영상을 포착하고 있다.

TV방송국, 영화 제작비 지원 협정

1974년 서독, TV와 영화의 행복한 만남이 시작됐다. 서독 공영텔레비전은 극장 상영 뒤 TV방영을 조건으로 영화제작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TV는 편성의 다양성을 꾀할 수 있었고, 영화인들은 풍부한 제작비로 작품의 질을 높였다. 그것은 뉴 저먼 시네마의 출발이기도 했다.

파스빈더, 헤어초크, 벤더스. ‘뉴 저먼 시네마’는 정치적, 감각적, 페미니스트적인 여러 장르의 영화를 포괄한다. 프랑스 인상주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등 다른 영화운동처럼 스타일상의 특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영화 외적인 뉴 저먼 시네마의 탄생 배경 때문일까.

60년대 정부 기금의 삭감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독일 청년영화는 70년대 중반에 나온 ‘협정’으로 숨통을 틀 수 있었다. 공영텔레비전의 지원은 각본 단계에서 영화 제작비를 지원하는 파격적인 형식. TV와 영화를 함께 살리는, 체계적인 영화 지원책이 영화사상 처음으로 서독에서 실시된 것이다. 그간 경쟁 관계로서만 인식돼오던 TV와 영화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정립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1974년 협정은 그야말로 젊은 영화인들 사이에 폭발적인 창작열을 심어줬다. 일단 유리한 제작 환경이 조성되자, 젊은 감독들은 갖가지 미학적, 정치적 실험을 담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일거에 내뿜었다. 공영텔레비전 역시 아우토렌필름(Autorenfilm) 또는 ‘작가의 영화(author’s cinema)로 이름 붙여진 고급 예술을 편성에 끼워넣는 방식으로 TV의 위상을 높였다.

뒤라스 “이젠 감독이라 불러주오”

<나탈리 그랑제>와 <갠지스강의 여인>으로 감독 입지 다져

1950년대엔 누보로망 계열의 소설가였다. 1959년 <히로시마 내 사랑> 시나리오로 영화와 인연을 맺는 듯하더니, 60년대 중반엔 직접 영화연출을 시작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1969년 <파괴하라고 그녀는 말한다>로 기존 영화계를 자극했던 그녀다. 그러나 이제 그의 영화계 행보가 본격화하는 것 같다. 1973년과 74년 연이어 인상 깊은 여성영화 두편인 <나탈리 그랑제>와 <갠지스강의 여인>을 제작, 명실상부 영화감독 뒤라스가 되었다.

그는 최근 영화작업을 통해 10여년 전 소설을 통해 보였던 세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제르멘 뒬락, 마야 데렌, 아녜스 바르다 등의 여성감독 영화에서 보인 ‘여성적 모더니즘’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언어 아닌 침묵을 영화로 끌어들였다. 기존 언어 체계의 밑바닥에 자리잡은 남성 위주의 질서를 새로운 상징언어인 침묵으로 균열을 낸다. <나탈리 그랑제> 등 최근 만들어진 뒤라스의 영화는 그만큼 정적이고 대사는 최소한이다. 관객은 그래서인지 영화가 느릿느릿하고 간결하다고 얘기한다.

<히로시마 내 사랑> 시나리오를 쓸 때만 해도 뒤라스는 달랐다. 전위적인 누보로망(Nouveau Roman·새로운 소설)에 기반하고 있는 그녀의 글은 장 콕토와 로브그리예가 그랬던 것처럼 실험적인 문학적 구상을 영화로 표현해 보려는 듯했다.

평론가들은 최근 제작된 뒤라스의 영화를 두고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차별적 영상언어가 출현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성적 글쓰기와 영화적 실험의 독특한 결합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섹스와 정치의 근접 조우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충격적 정사신 화제

철저히 익명으로 사랑을 나누라. 그것도 버터를 동원해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의 충격적인 정사가 파리 전역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순응주의자> 이후 2년여의 공백을 깨고 얼마 전 공개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신작이다.

최근 아내가 갑작스런 자살을 해 실의에 빠진 중년 남자와 젊은 여자가 파리의 빈 아파트에서 우연히 만나고, 그곳에서 둘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들의 에로틱한 만남을 위한 조건으로,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고 철저히 익명의 관계를 유지할 것에 동의한다. 서로의 육체만을 제외한 채. 스토리라인은 이렇듯 간단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논란거리가 된 것은 그들 정사장면이 보여주는 파격에 있다. 주인공 역의 말론 브랜도와 마리아 슈나이더는 황량하게 비어 있는 아파트 바닥에서, 그 황량함만큼이나 기쁘지 않고 고통스럽게 정사를 나눈다. 더욱이 뜨거운 논쟁의 핵심에 있는, 버터를 사용한 애널섹스 장면에 이르면, 외설스러운 느낌을 넘어 극에 달한 절망감이 드러난다. 이렇듯 유례없이 건조하고 과격한 만큼 허무한 섹스장면을 관객은 처음 경험했다.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이 몰고 온 강렬한 흥분에 대해 “영화표현에 있어서의 그의 기여는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것이다.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혼미하고 분석이 불가능하지만 동시대인에게 줄 수 있었던 최초의 충격, 그 영향력에 대해서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영화 속 과도한 섹스장면은 성(性)을 통해 파시즘을 비판하려는 베르톨루치의 정치적 의도로 비껴 읽힌다. 한편 할리우드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브랜도는 이 영화에서 그의 농익은 남성성과 파워를 가지고 연기에 몰입했다.

폴란스키의 아메리칸 필름누아르, <차이나타운>

많은 유럽감독들이 그렇듯이 로만 폴란스키 역시 아메리칸 필름누아르를 만들고 싶었다. 1974년에 나온 <차이나타운>은 대단히 현대적인 영웅- 하드보일드 탐정의 새로운 전형인 ‘무기력함’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현대적인- 제이크 기티스(잭 니콜슨)의 눈으로 1930년대 후반의 로스앤젤레스를 보여준다. 1970년대의 탐정스릴러에 등장하는 새로운 탐정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공간에 거주했다. 1937년이 배경인 이 시대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은 자욱한 담배연기만큼이나 음울하고 모호한, 도시의 이중성과 타락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중심으로 등장한다. 도시는 까지 않은 양파처럼 그 속을 모를 정도의 범죄와 음모로 얽혀 있고, 살인사건과 사기가 산재해 있다.

차가운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페이 더너웨이가 팜므파탈이자 잭 니콜슨의 연인으로 나오고, 그녀의 아버지 역에 <말타의 매>의 감독인 존 휴스턴이 출연, 암흑계의 실력자로서의 진수를 보여준다. 폴란스키 역시 악당 휴스턴의 똘마니로 나와 잭 니콜슨의 코에 작은 상처를 내는 역할을 맡았다. 그 덕에 니콜슨은 영화 후반부 내내 하얀 밴드를 코에 붙이고 나왔는데, 오히려 이것이 그의 건조하게 유머러스한 캐릭터를 더욱 인상 깊게 만들었다. 폴란스키는 그럴듯한 세트뿐 아니라 영화 자체로도, 지나간 과거로부터 누아르를 성공적으로 호출한 셈이 되었다.

텍사스에서 벌어진 피의 향연,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정신병적인 가족에게 피(살인)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인가? 토브 후퍼의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1974)은 아낌없는 피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시절을 아버지가 운영하던 텍사스의 영화관에서 몽땅 보내다시피한 토브 후퍼. 영화광인 후퍼가 택한 장르는 다름 아닌 공포영화였다. 그는 목가적인 미국의 시골을 여행하는 여행객들이 맞닥뜨린 끔찍한 이야기를 영화로 담았다. 여행객들이 만난 가족은 평범한 미국인 가정을 끔찍스럽게 역전시킨 것인데, 바로 송장 먹는 식인가족이다.

<싸이코> 이후의 현대 공포영화에서 가족은 가장 문제적 영역인데, ‘정상적인 가족’과 ‘괴물가족’을 겹쳐놓는 것이 이 시기 공포영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공식이다. 영화는 “위스콘신의 송장 먹는 귀신”이라고 불린 에드 가인이라는 유명한 실존 살인마에게서 소재를 빌려왔다. 그러나 후퍼의 뛰어난 촬영술과 편집이 더해져 상당한 위력을 발산하는 공포물로 거듭나게 되었다. 더욱이 센세이셔널한 영화제목은 실제 스크린상에서의 유혈낭자가 그리 많지 않음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토브 후퍼는 영화의 주제가 갖는 잠재성을 이용하여 또한 암시의 범주를 넘지 않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줄 것에 대한 불확실성이 감돌게 했다. 이 방식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대부분의 관객은 엄청난 살육장면을 보았다고 믿을 정도였다고. 섬뜩한 영화음악은 작곡가 웨인 벨과 후퍼가 공동으로 만든 것이다.

할리우드, 재난영화로 ‘관객 사냥’

<포세이돈 어드벤처> <타워링> <지진> 등 잇따라;

1970년대 들어 주목할 만한 경향 중 하나는 바로 거액의 제작비를 들인 ‘재난영화’들의 출현이다. 1970년 <에어포트>를 시작으로 1972년엔 <포세이돈 어드벤처>가, 1974년엔 <타워링> <지진>이 잇따라 만들어졌다. 이제 재난영화는 할리우드의 새로운 장르가 돼가고 있다.

제작사들은 1930년대 말 한때 유행한 적이 있는 재난영화인, 지진과 메뚜기떼의 공격 등을 소재로 한 <샌프란시스코>(1936), <좋은땅>(1939), <비가 왔다>(1939) 등이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최근 발전한 특수효과의 후광에 힘입어 재난영화 표몰이에 나섰다. 유니버설이 1970년에 <에어포트>로 도화선을 당겼고, 이어 폭스가 72년 <포세이돈 어드벤처>로 승부수를 띄웠다. 최근엔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에서 일어난 화재사건을 다룬 <타워링>이 공개되었는데, 이 영화엔 윌리엄 홀덴, 페이 더너웨이, 프레드 아스테어와 같은 스타급 배우들이 대거 출연, 더욱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스릴을 선보였다. 이러한 재난영화의 제작 열기는 내년에 개봉예정인 <에어포트 1975>와 <지진>으로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더욱이 이 영화들은 관객에게 더욱 강렬한 스릴을 제공하고자 영화의 주요 순간에 좌석이 흔들리도록 고안될 예정이어서, 영화 관객층에 새로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인 김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