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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32호 (1975∼1976년)
이유란 2004-02-26

존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유작이 된 <살로, 소돔의 120일>. 파졸리니는 이 영화 촬영을 끝내고 3주 뒤 , 그의 영화배경으로 여러 차례 등장했던 오스티아 해변에서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했다.

파졸리니, 의문의 죽음

시체에 난 상처 단독범행 의구심

파시스트 테러 가능성 등 '배후설 제기

누가 파졸리니를 죽였는가? 이탈리아 경찰이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살해를 17살 소년 피노 펠로시의 단독 범행으로 잠정 결론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졸리니의 죽음을 둘러싼 의구심은 점점 커져만 가고있다. 펠로시의 단독 범행으로 보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펠로시의 뒤에 ‘누군가’ 있다는, 이른바 배후설이 제기되고 있다.

파졸리니는 1976년 11월2일, 로마 근교의 오스티아 해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시신은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며 가슴에는 자동차 바퀴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이에 경찰은 파졸리니가 심하게 얻어맞은 뒤 자동차로 가슴을 치인 것으로 추정했다. 사건 직후 살인 용의자로 검거된 피노 펠로시는 “파졸리니가 죽을 때까지 때렸다”라고 시인했지만 “차로 친 기억은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펠로시는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Sal o le 120 Grinate di Sodoma)에 출연하기도 했던 소년으로 동성애자인 파졸리니는 사건 당일 밤 오스티아 해안 근처의 빈민가에서 그를 ‘픽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경찰은 이번 사건을 ‘성범죄’로 단순 결론지었다.

하지만 곧 의문들이 제기됐다. <에우로페로>는 “펠로시 혼자가 아니다. 범인은 두명의 폭주족이며, 마약세계의 깡패들이 개입되어 있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심지어 <코리에레>는 파졸리니의 죽음을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추측했다. 이같은 의문들이 제기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17살 소년이 혼자만의 힘으로 성인 남성을 때려죽였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정황상 누군가 파졸리니를 붙잡고 여러 명이 함께 두들겨패지 않고는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파졸리니에게 ‘적’이 많았다는 점도 이러한 배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좌파였던 파졸리니는 소설과 시, 영화를 통해 이탈리아 정부와 지배계급을 정면으로 비판해왔다. 죽기 일주일 전에도 그는 “모든 지배계급을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라는 ‘급진적인’ 글을 발표했다. 이같은 행보가 여당인 기독교민주당과 급부상 중인 네오파시스트 집단의 심기를 건드렸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1971년 군부와 네오파시스트 집단이 쿠데타를 기도한 뒤 지금까지 이탈리아 정국은 혼란 상태이며, 그 와중에서 극우파의 테러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정치 상황이 파졸리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이번 배후설의 핵심이다. 하지만 펠로시의 배후에 대한 수사는 아직 이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영화, 이렇게만 파시오

마케팅의 승리로 기록된 <죠스>의 흥행 신기록

27살의 애송이 감독이 만든 영화 한편의 대성공으로 할리우드는 지금, ‘마케팅’에 미쳐 있다. 이 영화가 흥행 신기록을 거둠에 따라 때로는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파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제작자 리처드 D. 자눅이 이 영화 한편으로 그의 아버지이자 전설적인 제작자인 대릴 자눅이 평생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가 바로 그 영화다. 유니버설은 <죠스>를 개봉하면서 대대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죠스> 제작비 1200만달러의 1/5 수준인 250만달러를 마케팅 비용으로 쏟아부었으며, 그 대부분을 개봉 1주일 전에 몰아서 썼다. 우선 개봉 전 관객에게 <죠스>를 인식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홍보전을 펼쳤다. 무려 70만달러를 들여 텔레비전 프라임 타임대에 광고를 내보내는가 하면, 스탭들이 개봉 8개월 전부터 토크 쇼에 출연해 <죠스> 홍보에 열올렸으며, 죠스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간명하고도 강렬한 포스터로 거리를 도배하고 존 윌리엄스가 만든 주제음악을 라디오로 내보냈다. 사전에 판권 계약을 한 원작소설은 개봉에 맞추어 출판되었다.

또한 유니버설은 <죠스>를 ‘와이드릴리즈’했다. 지금껏 와이드릴리즈는 별볼일 없는 영화를 개봉하면서 나쁜 입소문이나 리뷰가 나돌기 전에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 취하던 전략이었다. 하지만 유니버설은 와이드릴리즈가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는 1975년 6월20일 북미 전역, 464개의 개봉관에 <죠스>를 풀었다. 관련 상품들도 흥행에 바람몰이 노릇을 했다. 곧 사운드트랙, 티셔츠, 플라스틱 컵, 비치 타월, 상어 복장, 포스터 등 갖가지 상품들이 영화와 함께 끼워팔기(tie-ins) 품목에 올랐다. 이같은 홍보전에 힘입어 <죠스>는 250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모두 1억295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아듀, 버너드 허먼

영화음악가 버너드 허먼이 1976년 12월2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살. 13살에 작곡상을 수상하고 20살에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설립했던 허만은 30년대 오슨 웰스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위해 곡을 썼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허만은 웰스의 데뷔작 <시민 케인>의 음악을 맡으면서 영화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이후 <싸이코> <현기증> <새> 등 히치콕 영화 9편에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유작은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 그는 이 영화의 녹음을 끝낸 지 몇 시간 뒤에 세상을 떴다. 한편, 마틴 스코시즈는 <택시 드라이버>를 허만에게 바치겠다고 밝혔다.

그리말디, <1900년> 후폭풍 불까 '노심초사'

흥행 참패로 신작일정 줄줄이 삐걱… 유럽예술영화계까지 할리우드 투자 위축될까 걱정

이탈리아의 명제작자 알베르토 그리말디가 요즘 고민에 빠졌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신작 <1900년>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그의 이후 일정이 차질을 빚게 된 탓이다. 당장 대시엘 해밋의 <피의 수확>을 영화화하기로 한 베르톨루치의 차기작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그리말디가 제작하고 세르지오 레오네가 연출하기로 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제작이 연기되었다. 하지만 더욱 큰 걱정은 <1900년>의 실패로 유럽예술영화에 대한 할리우드의 투자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간에는 광범위한 합작이 시도돼왔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감독들 등 수많은 유럽 감독들이 미국의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할리우드의 투자가 가장 활성화된 곳은 이탈리아였다. 예컨대 1968년 이탈리아영화에 투자된 900억리라 가운데 이탈리아 자본은 220억리라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미국의 자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알베르토 그리말디는 1967년 미국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사와 계약을 맺고 미국-유럽 합작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파졸리니의 <켄터베리 이야기> <데카메론> <아라비안 나이트> 등이 그가 제작한 영화들이다. 그리말디의 목표는 위대한 예술영화 감독들을 상업영화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영상예술과 스펙터클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1972년 그리말디는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제작한다. 이 영화는 X등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만 4천만달러의 수익을 거두어들였다. <파리…>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갖게 된 그리말디와 베르톨루치는 대작인 <1900년>의 제작에 돌입했다. 그리말디는 제작비를 높이기 위해 파라마운트, 폭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등 세 회사에 영화를 팔았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를 본 스튜디오 관계자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상영시간이 무려 6시간15분이었던 것이다. 계약 당시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3시간20분을 넘어선 안 된다고 못 박았던 터였다. <1900년>의 편집을 둘러싼 논란은 끝내 법정 공방으로까지 비화됐다. 그리고 메이저 영화사들은 상영시간을 4시간8분으로 축소한 버전을 극장가에 풀었다. 하지만 <1900년>은 비평에서도, 흥행에서도 죽을 쑤고 말았다. 그러자 영화사들은 그에 대한 ‘응보’로 그리말디의 신작에 대한 투자를 철회했다.

영화계 '우먼파워' 물결

메자로스 <어돕션>으로 베를린 그랑프리

<인디아송> 등 페미니즘영화 잇따라 발표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라! 최근 들어 여성감독들의 스크린 진출이 괄목상대하고 있는 가운데,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성감독이 영예의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헝가리 여성감독 마르타 메자로스의 <어돕션>이 1975년 7월8일 폐막한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성감독이 그랑프리를 차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마르타 메자로스의 <어돕션>은 유부남 애인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43살의 독신여성 케이트와 그녀의 삶에 갑자기 뛰어들어온 보호소 소녀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성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흑백영화다. 메자로스는 남편인 미클로시 얀초, 이스트만 자보와 함께 헝가리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돕션>의 그랑프리 수상은 여성영화의 현주소를 가늠하게 하는 시금석의 의미를 갖는다. 60년대 중반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여성영화는 질과 양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1975년 한해만 살펴보아도 모더니즘영화의 사건으로 평가받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송>,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 마가레타 폰 그레타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영예> 등이 발표되어 페미니즘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이론진영에서는 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라는 논쟁적인 글을 발표했다.

베리만, 무니치에 안착하다

스웨덴의 대표 감독, 조국을 등지고 독일에 정착하게 된 사연

<마술 피리>. 잉마르 베리만이 스웨덴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감독 잉마르 베리만이 마침내 독일 무니치에 정착했다. 스웨덴을 등진 뒤 여러 곳을 떠돌던 베리만은 “스톡홀롬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무니치를 제2의 고향으로 택했다. 베리만이 스웨덴을 떠나게 된 건 느닷없이 벌어진 세금포탈 사건 때문이었다. 외국에 유령 회사를 차려 세금을 포탈했다는 게 그에게 덧씌워진 혐의였다.

1976년 1월30일, 베리만이 4월 프리미어를 앞두고 <죽음의 춤>을 연습하고 있던 극장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용의자’인 베리만이 도주할 것을 우려해 극장 입구를 봉쇄한 경찰은 세금포탈 혐의로 베리만을 연행해갔다. 사단은 이렇다. 베리만은 1967년 스웨덴 은행의 허가 아래 스위스에 ‘페르소나 리미티드’라는 재단법인을 설립한다. 페데리코 펠리니와 함께 신작 <러브 듀엣>을 찍기 위해서였지만 이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이어 추진하던 영화마저 무산되자 그는 법인을 해산했다. 하지만 스웨덴 국세청은 “페르소나 리미티드가 한 일이 없으므로 세금포탈을 위해 설립한 유령 회사로 볼 수밖에 없다”고 단정지었다. 그리고는 쉽게 연락이 닿지 않는 베리만을 붙잡기 위해 극장을 급습했던 것이다. 베리만은 <죽음의 춤> 연습에 몰두하느라 외부와 거의 연락을 끊고 지냈다. 이날 베리만은 경찰에 끌려가 3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때 그를 따라온 경찰은 그의 아파트를 뒤져 개인문서와 여권 등을 압수해갔다. 하지만 경찰은 그에게서 특별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일은 베리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에게 쫓기는 망상에 시달리던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2달간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퇴원 뒤 3월22일치 <엑스프레센>에 실린 서한을 통해 스웨덴을 떠날 계획임을 밝혔다. 이 서한에서 그는 “창작을 할 수 없으면 존재할 수도 없는데, 이 나라에서는 더이상 창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밝혔다.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도 숨기지 않았다. 스웨덴을 떠난 베리만은 파리로 갔고, 파리를 거쳐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를 둘러본 그는, 하지만 미국에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여러 나라의 수도를 떠돌다 무니치를 망명지로 선택했다.

호금전의 <협녀>, 칸에서 기술 인정

호금전의 <협녀>가 1975년 칸영화제에서 기술대상을 수상했다. 1966년 <대취협>으로 데뷔한 이래 무술영화 장르를 크게 혁신해온 호금전 감독이 대만으로 이주, 무술영화를 위한 스튜디오를 설립해 만든 <협녀>는 제작에 3년이 걸린 대작. 홍콩에서는 이미 1971년에 개봉됐다.

소련 자본 ‘구로사와’표 영화, 미국서 수상

구로사와 아키라가 소련 자본으로 만든 영화로 미국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도데스카덴>의 실패 이후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구로사와는 소련의 모스필름에서 제작한 <데루스 우잘라>로 1976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데루스 우잘라>는 이미 1975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편집인 이유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