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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이스라엘 영화주간’ 유대 소시민들의 작은 기적을 보여주다

방독면 쓰고 사랑을 나누다

젖과 꿀이 흘러야 할 약속의 땅, 그러나 테러와 전쟁만을 약속한 듯한 땅 이스라엘에선 영화를 만들 여유라도 있을까, 라는 순진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눈여겨볼 만한 영화제가 있다. 주한이스라엘대사관과 영화사 백두대간 주최로 4월21일(수)부터 4일간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열리는 ‘2004 이스라엘 영화주간’은 외신 뉴스로 전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에 대한 사회·문화적 이해 증진을 도모한다는 취지답게, 유수 영화제의 검증을 거친 다섯편의 영화들은 유대인들의 세계를 한결같이 소시민의 일상에서부터 접근해간다. 그간 꾸준히 소개된 아랍권 영화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지만, 정치적 입장이 어떻든 인간적인 공감에 무리가 없다는 점은 국경없는 영화의 연대성을 재확인하게 해줄 듯. 적어도 오만한 민족주의와 호전적인 근본주의는 영화의 이념이 아닌 것이다.

개막작인 <야나의 친구들>(Yana’s Friends)은 1999년 카롤로비 바리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따낸 아릭 캐플런 감독의 수작으로 부산영화제에도 소개된 바 있다. 러시아 이민자 야나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낙태까지 하지만, 스커드 미사일이 날아드는 걸프전 와중에도 유대인 사진작가와 새로운 사랑을 싹틔운다. 공습경보만 울리면 방독면 쓰고 침대로 기어드는 두 연인의 기막힌 사랑법은 전쟁과 일상의 간극을 아이러니하게 건드린다. 여기에 반신불수 전쟁영웅을 둘러싼 가족드라마와 ‘천국보다 낯선’ 약속의 땅에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애환이 작은 기적을 향해 뒤섞여든다. 리크리스 에란 감독의 <불칸 정션>(Vulcan Junction) 역시 전쟁을 후경에 배치한 휴먼드라마. 1973년 10월 욤키푸르 전쟁 일주일 전, 일군의 젊은이들이 변화와 도전에 직면해 새 삶을 시작하려 한다. 전쟁 직전의 순수하고 자신만만했던 과거로 회귀하는 여정은 영화에 강한 노스탤지어를 불어넣고 있다.

남녀간의 사랑에 집중한 영화들은 로맨틱코미디는 아니지만 로맨틱하고 코믹할 뿐 아니라 끝까지 드라마의 감동을 놓치지 않는다. 가비존 샤비의 <나나거리의 추억>(Lovesick on Nana Street)은 해적 케이블 방송을 운영하는 청년이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스토커처럼 구애하다가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이야기. 그런데 자기 같은 사람들이 모인 병원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해주는 반전의 공간이 된다. 부르슈타인 이갈의 <영원한 행복>(Everlasting Joy)도 상사병이 소재다. 주인공은 엉뚱하게도 현대의 텔아비브에 나타난 스피노자. 이 네덜란드계 유대 철학자는 한 여인에 대한 짝사랑 끝에 인간 행복의 비밀을 캐려는 장구한 사색에 들어간다. 스피노자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구미가 당길 시대착오적 코믹판타지다. 샤레즈 줄리 감독의 <아풀라 탈출기>(Pick A Card)는 텔아비브에서 마술사로 성공하기 위해 아풀라 지방을 탈출하는 자동차 전기기사의 모험담을 담았다. 그러나 그는 마술사 자질이 부족하고, 그의 애인은 그에게 꿈과 현실의 차이를 깨닫게 해주려 한다. 도시에서의 성공을 바라는 소시민들의 사랑이 마술을 빚어내는 과정은 라스트의 불꽃축제로 마무리된다.

때론 서구영화의 흔적이 엿보이고 때론 아랍권의 소박함이 묻어나는 이스라엘영화들은, 어딘지 촌스럽지만 쉽게 단정하기 힘든 드라마의 묘미로 은근한 재미를 선사한다. 우리로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고대어와 다를 바 없는 히브리어가 낯설기 그지없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사랑하고 아파하며 사색하고 기뻐하는 유대인들의 삶마저 낯선 건 아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신의 자손들이 아니라 준전시상황에서도 일상의 행복을 갈구하고 향유하는 인간들일 뿐. 그래서 <십계>의 웅장함도 <쉰들러 리스트>의 비장함도 없는 네이티브 이스라엘리들의 영화엔 종교와 역사의 기적 대신 잔잔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작은 기적들이 도사리고 있다. 대단한 스타는 아니지만 제3세계 어디서나 존재할 것 같은 배우들은, 미국을 동경하면서 러시아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평범한 변방인들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기교없는 사운드와 카메라도 그들이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일깨워주기 충분할 만큼 소박하고 정직하다. 그래서인지 가격도 3천원으로 저렴하다. 영어·한글 동시자막이며, 5월6월엔 대구, 광주, 부산 등지에서도 개최될 예정(문의: 02-2002-7770∼1, www.cineclub.net).정승훈/ 영화평론가 reptile2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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