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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헌사, <효자동 이발사>

절망의 시대를 참고 살았던 아버지 세대에게 바치는 판타지. <포레스트 검프> <인생은 아름다워> <자전거 도둑>의 기묘한 조합으로 만들어낸 아버지와 아들의 멜로드라마

아버지는 모욕을 참아야 했다. 참지 않으면 먹고살 길이 없었다. 아버지는 울분과 설움을 삼켜야 했다. 삼키지 않으면 가족을 지킬 도리가 없었다. <효자동 이발사>의 주인공 성한모(송강호)는 그런 아버지다. 깎쇠라고, 두부 한모라고 놀림받아도 얼굴 붉힌 적 없는 착한 남자라서 그랬다. 권력자가 무슨 짓을 하든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믿는 어수룩한 사내라서 그랬다. <효자동 이발사>는 바보 같은 아버지의 이야기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통에 가슴에 피멍이 들었던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다. 한국의 현대사는 이 못난 인간을 가차없이 내동댕이쳤지만 영화는 그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효자동 이발사>는 뒤틀린 역사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던 아버지 세대에게 바치는 헌사다.

1950년대 자유당 정권 시대부터 1980년 전두환 정권 수립까지 30여년 세월을 배경으로 영화는 한때 대통령의 머리를 깎았던 성한모의 일대기를 그린다. 대통령이 사는 동네 효자동에서 이발관을 하는 이 남자는 사사오입이 무슨 말인지 모를 만큼 정치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부정선거에 개입하는 일도 꺼리지 않았다. 이발소에서 조수로 일하던 여자(문소리)와 사사오입이라는 황당한 논리를 들어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 돈은 못 벌어도 오래 살라고 낙안(이재응)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성한모는 그 시절 서민을 대표한다 할 만한 인물이다. 대통령의 이발사만 아니라면 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서울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설사를 하면서 시작된다. 정부는 간첩들의 설사가 전염병 때문이라고 발표하고 설사를 한 사람들을 간첩과 접선한 용의자라며 잡아들인다. 이로 인해 조용하던 효자동은 들썩거린다. 연탄가게, 만두가게, 쌀집 주인 등이 차례로 경찰서로 끌려가던 그때 성한모의 아들 낙안이 설사를 시작한다. 대통령 경호실장의 매서운 눈초리가 무서웠던 아버지는 아들을 경찰서에 데려가고 아들은 접선한 간첩을 대라는 전기고문을 받게 된다.

설사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간다는 설정에 다소 당황하겠지만 <효자동 이발사>의 상상력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동백림, 민청학련, 인혁당 등 60∼70년대 수많은 간첩단 사건이 말도 안 되는 조작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실미도>처럼 실화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효자동 이발사>는 다소 단순화시키면 <포레스트 검프> <인생은 아름다워> <자전거 도둑> 등 3편의 영화를 기이한 방식으로 결합한 영화다. 먼저 가상의 주인공 성한모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한가운데 놓인다는 설정은 <포레스트 검프>와 같다. 그가 대통령의 미국 순방길에도 따라나서는 장면은 대표적인 예다. 가장 참혹한 순간을 유머와 재치로 돌파한다는 점에선 <인생은 아름다워>를 연상하면 좋을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현장을 코미디의 무대로 바꿔버린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효자동 이발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전기고문 장면을 익살과 판타지로 대체한다. 극 전반부에 등장하는 부정선거 규탄시위 현장은 단적인 예다. 출산을 앞둔 아내를 싣고 손수레를 밀고 가던 성한모는 의사로 오해받는다. 비극은 이 엉뚱한 충돌로 인해 희극이 된다. <인생은 아름다워>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자전거 도둑>은 아버지와 아들의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방식에서 <효자동 이발사>에 영감을 불어넣은 작품으로 보인다. 두 영화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과 멸시를 당한다. 아무도 아버지의 고통을 알지 못하기에 아들의 마음은 아프다. <효자동 이발사>는 <자전거 도둑>을 낳은 네오리얼리즘과 별 관련이 없지만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점에선 다르지 않다. 아들이 지칠 대로 지친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을 때, 아버지가 아들을 등에 업고 걸어갈 때 두 영화는 부자간의 정으로 삶의 온기를 되찾는 방법을 일러준다.

임찬상 감독은 연출의 변에서 “60∼70년대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아버지를 떠올렸다…. 이 영화는 그 사람의 시선에서 세월과 역사의 흐름을 보려 한다”고 말했다. <효자동 이발사>는 이런 분명한 목표를 착실히 수행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중심엔 성한모를 연기한 배우 송강호가 있다. 그는 목에 힘을 주지 않고도 관객을 압도한다. 출연작 가운데 드물게 울분을 쏟아내는 격정적 장면이 있지만 송강호의 연기가 빛나는 건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목 때문은 아니다. 나지막이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듯한 말 한마디에 울고 웃게 되는 걸 보면 이 영화가 온전히 송강호의 영화라고 믿게 된다. <살인의 추억>도 그랬지만 그에겐 역사의 중압감을 덜어내고 인간의 무게를 늘리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신인감독의 데뷔작으로서 <효자동 이발사>는 <범죄의 재구성>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범죄의 재구성>이 장르에 대한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영화인 반면 <효자동 이발사>는 한 인간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만 집중한다. 그 결과 <범죄의 재구성>은 인물의 내면 깊이 들어가길 포기하고, <효자동 이발사>는 역사와 정면대결하길 거부한다. 영화는 우화와 신화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리석고 못난 아버지가 아들의 영웅이 되는 이야기인 <효자동 이발사>는 거꾸로 강하고 사악한 아버지(권력)를 거부하게 되는 약하고 선한 아들(성한모)의 이야기도 된다. 그리스 신화의 한 토막처럼 아들은 아버지의 눈을 파서 부친살해를 실행한다. 그러나 두 아비를 가르는 뚜렷한 선악구도는 <효자동 이발사>가 반란의 영화가 아니라는 걸 입증한다. 영화는 암흑의 시대를 비판하기보다 넓지 않았지만 따뜻했던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데 마음을 뺏긴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등 현대사를 배경으로 삼은 최근 한국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다. 다르다면 이번엔 자살하거나 미치지 않고 다시 일어선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질주한다는 점이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죽음과 광기로 전 세대와 단절한 반면 <효자동 이발사>는 판타지를 통해 과거와 결별한다. <효자동 이발사>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헌사이자 아버지처럼 살기 싫어 꿈을 꾸는 요즘 세대의 자기 위안이다.

:: <효자동 이발사>와 한국 현대사

아버지가 들려주는 시대의 우화

<효자동 이발사>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직접적인 방식은 아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 시절에 관해 이 영화는 구체적인 사실 대신 상황만 인용한다. 설사하는 사람을 간첩으로 모는 황당한 상상을 고증을 통해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순으로 보면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이 가장 먼저 나온다. 1954년 11월29일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은 사사오입이라는 논리를 적용시켜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성한모는 같은 이유를 들어 다섯달된 아이니까 낳자고 설득하고 결혼하게 된다. 아들 낙안이 태어날 무렵엔 영화의 배경으로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 박정희 소장의 주도로 5·16 쿠데타가 발생한다. 설사병이 간첩죄로 몰리는 결정적 계기는 1968년 1·21 사태다. <실미도>에서 등장했듯 이 사건은 남북관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간다.

<효자동 이발사>에 나오는 사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조작 간첩단 사건은 1974년 일어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연상시킨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학생운동의 배후에 민청학련이 있으며 민청학련의 배후엔 간첩조직인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인혁당은 이미 1964년 한차례 소동을 빚었던 조직이었다. 1차 인혁당 사건 때 재판을 맡은 공안부 검사들은 혐의를 찾지 못해 사표를 던진 바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일어난 2차 인혁당 사건에서도 중앙정보부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끝없는 고문뿐이었다. 재판은 고문에 의한 진술서를 받아들여 진행됐고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1975년 4월9일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각에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세계 어디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국제법률가협회는 이를 ‘사법살인’이라 명명하고 이날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했다. <효자동 이발사>에선 연탄가게, 만두가게, 쌀집 주인 등이 그렇게 죽어간 걸로 나온다. <효자동 이발사>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살해사건을 대단원의 막으로 사용한다. 중앙정보부와 경호실의 암투도 비중있게 나오는데 임상수 감독의 다음 영화가 10·26을 다룬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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