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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이너 예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아가씨,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고 예수를 만나는 다른 루트를 고민하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나의 단점만을 꼼꼼히 분석하여 생활기록부에 ‘가’를 매기고도 남을 엄격한 선생님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는 비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가혹한 체벌을 받아 마땅할 것만 같은 공포가 서린다. 예수의 난자된 신체로 ‘충격과 공포’를 생산하여 관객을 집단체벌하는 멜 깁슨. 한편, 요즘 미국에서는 예수의 전투성과 남성성을 부각시킨 소설이 유행한다. 메시아의 이미지가 좀더 전투적이며 남성적인 컨셉으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패션…>에서 예수가 부활하는 마지막 장면이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연상시킬 법도 하다. 믿지 않는 자들의 테이블을 엎어버리는 예수의 전투적 이미지가 21세기 성서해석의 새로운 트렌드라는 소문도 있다.

신에게 다가가는 ‘단 하나의 길’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좀더 친절한 입구를 열어주는 영화는 <몬트리올 예수>다. 이 영화는 예수를 20세기 말 대도시 한복판에 내려놓음으로써 예수로 하여금 다채로운 삶의 무늬들과 만나게 한다. ‘이 길만이 신께 가는 길이야’라고 외치지 않고 ‘네 옆에 널린 여러 갈래길 중 가장 편한 길로 와’라고 속삭이는 예수. 영화를 따라가다보면, 때로는 디오니소스와 같이 축제의 흥을 돋우는 ‘노는 신’과 같은 예수, 때로는 누구보다 매력적이며 사랑의 기술에 능한 에로스와 같은 예수에 매혹당한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는 마침내 상처 입은 예수를 이 도시의 밑바닥,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철로 내려보내며 예수를 무한히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다. 영화를 통해 관객은 자문하게 된다. 왜 우리는 예수를 2000년 동안 끊임없이 반복하여 불러내면서도, 늘 똑같은 표정으로 예수를 맞이해왔던가. 예수를 만나는 또 다른 루트는 없는 것일까.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수난설화 중 확증가능한 사실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빌라도 총독에 의해, 아마도 유월절 축제와 관련되어,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는 정도라 한다. 그러므로 특히 영화와 같은 대중매체에서 성서해석의 문제는 ‘누가 더 사실적인가’가 아니라 ‘왜, 어떻게 성서를 해석하는가’일 터이다. 즉, ‘구라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총천연색 구라의 각축전 속에서 ‘어떤 구라가 가장 강렬한 상상력과 혁명의 열정을 품고 있는가’가 관건인 셈이다. <패션…>은 뮤직비디오스러운 스펙터클과 이미지를 강화할 뿐 성서의 내러티브에 어떤 풍요로운 주석달기도 거부한다. <마태복음>이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같은 아름다운 기독교 영화의 공통점은 성서의 해석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했다는 점, 신을 증오하는 이들까지도 예수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을 정도로 살아 꿈틀대는 상상력과 캐릭터를 품어안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독실한 가톨릭인 내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뻥튀기의 기적’이 아니라 ‘나눔의 기적’이라 한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전 재산인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내놓자 어른들도 너나없이 숨겨둔 식량을 꺼내놓아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것. 가나의 결혼식에서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도 ‘화학적 기적’이 아니라 ‘잔치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한’, 엔터테이너로서의 예수의 재기발랄함을 보여주는 기적이라 한다. 예수의 매력은 기적을 행하는 마술적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은 이미 일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케 한 것이라는 얘기. 그녀를 통해 나는 신성성의 베일에 가려진 예수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발견하는 희열을 느낀다. 나는 신보다는 예수가 사랑스럽다. 예수의 ‘영광의 상처’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20대’에 눈길이 간다. 예수의 빛나는 말씀보다는 그의 말들 사이의 망설임과 침묵을, 그의 찬란한 빛을 토해낸 어둠의 힘을 발견하고 싶다.

정여울/ 미디어 헌터 subur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