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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을 위한 ‘아주 특별한’ 생일잔치
홍성남(평론가) 2004-05-11

서울아트시네마, 2주년 기념으로 13편의 영화 상영

2002년 5월10일 개관 이후 각종 회고전으로 영화애호가들의 호응을 얻으며 자리를 굳힌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가 푸짐한 두돌 생일 잔칫상을 차리고 영화팬들을 초청한다. 5월11일부터 19일까지 ‘시네필의 향연’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아트시네마 개관 2주년 기념 영화제는 종합선물세트. 특정감독이나 유파를 테마로 고르는 대신, 193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사랑받은 13편의 수작을 묶었다. 영화제 기간 중에는 오늘날의 영화광과 시네마테크 문화, 영화 문화의 다양성 확보를 위한 방안을 토의하는 대화의 시간도 마련된다.

편집자

<시네필의 향연-서울아트시네마 개관 2주년 기념영화제>

일시 : 5월11일(화)∼19일(수) 9일간

장소 : 서울아트시네마

주최 :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후원 : 서울문화재단, 주한프랑스대사관 문화과, 일본국제교류기금

광주국제영화제,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진흥위원회

문의 : 02-720-9782, 745-3316, www.cinematheque.seoul.kr

<시골에서의 하루>

Une Partie de campagne감독 장 르누아르, 1936년, 흑백, 40분

<시골에서의 하루>는 “러닝타임이 35분에서 40분 정도 되는 이야기를 써서 그것을 가지고 큰 영화 같은 것을 만들면 흥미롭겠다”라는 장 르누아르의 생각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시골에서의 하루>는 르누아르의 그런 의도가 실현된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모파상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파리의 상인이 가족을 데리고 시골에 소풍을 갔다가 묵게 되는 여관에서 벌어지는 유혹의 이야기를 그린다. 르누아르는 “강만큼 신비로운 것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서정성이 한껏 살아나는 <시골에서의 하루>는 르누아르를 그렇게 강렬하게 사로잡은 강을 거의 캐릭터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면서 아름답게 포착한 영화로 이야기되는 영화다. 르누아르가 제작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이 영화는 미완성의 걸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몽키 비즈니스>

Monkey Business 감독 하워드 혹스, 1952년, 흑백, 97분

캐리 그랜트가 화학자로 나오는 들뜬 코미디영화 <몽키 비즈니스>는 하워드 혹스-캐리 그랜트의 협업이 빛났던 걸작 코미디 <베이비 키우기>의 연장선상에 놓인 영화라고 부를 만하다. <젊음의 샘> 혹은 <하니, 내가 점점 젊어지고 있어요>라는 제목을 달 수도 있었던 영화이니만큼 사람들이 젊어진다는 이상한 상황이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화학자인 펄튼은 사람들을 젊어지게 하는 약을 연구 중이다. 그의 이 노력은, 우연하게도 실험실의 침팬지가 약을 섞어놓은 것이 펄튼이 바라던 공식을 만족시키면서 결실을 맺게 된다. 혹스 자신은 몇몇 결점을 늘어놓으면서 생각만큼 재미있지 않다고 자평했지만 사실 <몽키 비즈니스>는 혹스-그랜트 콤비의 빛나는 코미디 감각을 알아볼 수 있는 유쾌한 영화에 속한다. 이 영화는 평론가들의 찬사도 얻었는데 예컨대 로빈 우드 같은 이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출중한 묘사를 지적하면서 혹스의 가장 “유기적인” 코미디라고 쓰기도 했다.

<밴드 웨건>

The Band Wagon 감독 빈센트 미넬리, 1953년, 컬러, 111분

뮤지컬 장르의 대명사 같은 존재인 빈센트 미넬리가 만든 최고의 뮤지컬영화 가운데 하나인 <밴드 웨건>은 당연하게도 <사랑은 비를 타고>(스탠리 도넌·진 켈리, 1952)와 할리우드 영화사상 최고의 뮤지컬 자리를 다툴 만한 걸작이다. 일종의 백스테이지 뮤지컬이랄 수 있는 이 영화에서 프레드 아스테어는 컴백을 생각하고 있는 왕년의 영화스타 토니를 연기한다. 그는 유명한 감독인 코르도바, 젊은 발레리나 개비 등과 함께 팀을 이뤄 공연을 준비한다. <밴드 웨건>의 재미는 아무래도 황홀한 안무와 아름다운 선율이 조화를 이룬 장면들을 보는 데 있을 것이다. 특히 유명한 것은 미키 스필레인식의 하드 보일드 스토리를 뮤지컬 스타일로 훌륭하게 해석해낸 “걸 헌트” 시퀀스이다. 이런 매혹적인 시퀀스들은 (영화에 나오는 노래의 제목을 빌리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엔터테인먼트군”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감독 르네 클레망, 1960년, 컬러, 112분

르네 클레망 감독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태양은 가득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논란을 일으켰던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씨>를 영화화한 것이다. 흔히 ‘선탠을 한 필름누아르’라고 불리곤 하는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태양이 가득한 풍광 아래서 벌어지는 음모와 욕망의 이야기를 그린다. 톰은 부유한 필립의 아버지로부터 방탕한 아들을 미국에 데려오면 거액을 쥐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이탈리아로 온다. 그러나 필립에게서 모멸감을 느낀 톰은 그를 죽이고 이제 그의 정체성을 대신하려 한다. 클레망의 산뜻한 연출도, 폴 게고프(클로드 샤브롤과 긴밀하게 작업했던)의 뛰어난 각색도, 그리고 앙리 드카에가 포착한 멋진 이미지도 돋보이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를 기억에 남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알랭 들롱의 매력일 것이다.

<쉘부르의 우산>

Les Parapluies de Cherbourg 감독 자크 드미, 1964년, 컬러, 87분

자크 드미는 흔히 뮤지컬영화에 관심을 가진 유일한 프랑스 영화감독으로 불리곤 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쉘부르의 우산>은 뮤지컬이면서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뮤지컬과는 좀 다른 영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 영화의 특징이라면 드미 자신이 이야기한 대로 “노래로 불리는 대사로 이뤄진 영화”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대담한 방식 때문에 드미는 이 영화를 완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쉘부르의 우산>은 노래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색채로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드미는 집들의 내부와 외부를 색채를 배열할 수 있게 칠해서 인물들의 의상과 조화되게 했다고 한다. 스토리 면에서 <쉘부르의 우산>은 두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꽤 가슴아프게 그리면서 지나가 버리는 감정으로서의 (진실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포인트 블랭크>

Point Blank 감독 존 부어맨, 1967년, 컬러, 92분

<뉴욕 타임스>의 보슬리 크로더라는 영화평론가는 <포인트 블랭크>에 대해 쓰면서 이것은 젊은이들이나 우아한 취향을 가진 그 어떤 사람에게도 어울리는 영화는 아니라고 했다. 그건 <포인트 블랭크>라는 이 영화가 상당히 과격하고 사디스틱한 범죄영화라는 의미였다. <포인트 블랭크>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60년대 후반의 (사회적, 영화적) 정서와 교감하는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듯하다. 영화는 친구에게서 배신당한 도둑 워커의 복수극을 그린다. 그의 파트너인 말은 워커의 아내와 정을 통하고 있었던데다가 결국에는 죽은 것으로 여겨져 버림당하기까지 한다. 살아온 워커는 잔인한 복수극을 감행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에너지 넘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포인트 블랭크>는 존 부어맨의 연출력이 특히 돋보이는 영화다.

<엄마와 창녀>

La Maman et la putain 감독 장 외스타슈, 1973년, 흑백, 220분

필립 가렐이 “대적하기가 힘든” 위대한 시네아스트라고 불렀던 장 외스타슈의 대표작. 영화는 별다른 할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어느 정도는 지적이라고 자부하는 백수 알렉상드르의 여성 편력기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게는 아파트를 함께 쓰게 해주면서 도움을 주는 30대 여성 마리가 있는데도 그는 자유분방한 간호사 베로니카와의 관계에도 빠져들게 된다. 무려 3시간30분이나 되는 긴 러닝타임 안에 이처럼 ‘사소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영화는 ‘엄마’와 ‘창녀’ 사이를 오가는 한 남자가 겪는 관계의 미묘한 변화를 따라가는가 하면 68년 이후 패배주의적인 정서가 팽배한 동시대의 공기를 정확하게 포착하려고도 한다. 감독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훌륭하게 접합해내는 솜씨를 보여준다.

<복수는 나의 것>

復?するは我にあり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1979년, 컬러, 139분

지나치게 싸늘한 시선을 견지하면서 한 연쇄살인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은 아마도 영화사상 가장 불편하면서도 창의적인 연쇄살인자 영화라고 불러도 될 만한 걸작이다. 여기에서 이마무라는 교활한 사기범에다가 잔인한 연쇄살인자인 한 남자를, 일본사회라는 ‘시스템’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그 징그러운 괴물 같은 존재를, 그리고 그의 삭막한 주변을 대단히 비정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이마무라는 그의 범죄 동기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깊은 불편함을 남겨주는 동시에 인간과 사회의 어떤 복잡한 본성을 보았다는 인상을 갖게 만든다.

<여성의 정체>

Identificazione di una donna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982년, 컬러, 131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성의 정체>는 시각에 따라서는 그의 60년대 영화들만한 성취를 거두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여하튼 현대 유럽영화의 중요한 자산임을 부인할 수 없는 작품이다. 영화는 다음 영화의 이야기를 찾고 있는 영화감독 니콜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픽션 속의 여인과 현실의 여인 모두를 구하는 그는 두명의 여인을 만나지만 그 관계는 모두 허망하게 끝을 맺는다. 미묘하게 에로틱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성의 정체>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특이하게도 여성이 중심인물이 아니면서도 ‘여성영화’라 불릴 수 있는 영화로서 여성의 심리와 제목대로 여성의 정체를 탐구하는 영화이다.

<우리의 사랑>

A Nos amours 감독 모리스 피알라, 1983년, 컬러, 95분

지난해 타계한 프랑스의 영화감독 모리스 피알라는 흔히 어떤 위기의 순간을 잘 포착하는 시네아스트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우리의 사랑>은 청춘의 위기, 가족의 위기, 그리고 선택의 위기 등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을 던져놓고는 그것들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은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인 10대 소녀 쉬잔느는 언젠가부터 남자와 함께 있을 때에야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성적인 관계를 갖는다. 쉬잔느의 가정은 아버지가 집을 나가면서 신경증이 만연한 곳이 된다. 영화는 피알라 특유의 자연주의자적인 시선으로 감정의 갑작스런 분출을 관찰하면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탐구한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La Double vie de Veronique 감독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1991년, 컬러, 98분

폴란드에서 한 여성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때 멀리 프랑스에 사는 한 여성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그런 식의 비탄에 잠긴다.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이처럼 두개의 삶을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신비로우면서도 시적인 필체로 쓴 영화다.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크는 서로 알지는 못하더라도 실은 공통의 영역에 놓여 있는 듯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생일도, 외모도, 재능도, 심지어는 건강상의 문제까지도 공유하고 있다.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것의 문제를 성찰한다. 어딘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비주얼은 이 문제의 불가사의함을 효과적으로 강화해준다.

- autoportrait de decembre 감독 장 뤽 고다르, 1995년, 컬러, 62분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은 영화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무방할 시네아스트인 고다르가 필름으로 쓴 65살의 자화상과도 같은 영화다. 다시 말해 어떤 늙은 예술가의 (자기) 초상에 대한 이 영화에서 고다르는 스위스의 집에서 보내는 날들을 보여주는가 하면 고다르 특유의 방식으로 여타의 텍스트들로부터의 인용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것이 흥미로운 자화상일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들, 이를테면, 이미지, 편집, 정치, 시간, 그리고 영화 자체 등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안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에서 우리는 고다르라는 노예술가의 소회도 들여다볼 수 있고 그래서 감동을 느낄 수도 있다. 짐 호버먼은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이 죽음, 부재, 침묵으로 채워져 있다고 쓴 바 있다. 어느새 영화청년의 자리로부터 훨씬 멀어진 고다르가 노년에 느끼는 감정들이 그런 것일까?

<좋은 직업>

Beau travail 감독 클레르 드니, 1999년, 컬러, 92분

현재 활동하는 프랑스 영화감독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인 클레르 드니의 대표작. 영화는 아프리카의 프랑스 외인부대에 카메라를 가져가서는 선망과 기억, 질투 등의 문제를 미묘하게 들려준다. <좋은 직업>은 한마디로 살아 있는 관능성이 마구 꿈틀대는 영화다. 외인부대원들의 잘 빠진 몸매와 잘 안무된 그들의 유연함 같은 시각적 요소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이 담긴 숏을 이어붙이고 그 위에 또 여러 종류의 음악들을 덧붙여낸 영화의 구조 자체가 회피할 수 없는 관능미를 풍긴다. 아직 드니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면 이 영화를 보고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