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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살 안에도 ‘사람’이 산다, 제8회 인권영화제 개막
김현정 2004-05-20

제8회 인권영화제 ‘감옥의 인권’을 주제로 개막

제8회 인권영화제가 5월21일부터 26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와 아트큐브에서 열린다. 40편에 이르는 영화가 상영되는 이번 인권영화제는 ‘감옥의 인권’을 주제로 택했다. 죄를 지었다고 해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해선 안 되고, 빈곤층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죄수의 인권을 지지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범죄와 빈곤의 관계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 유명한 아티카 감옥 반란을 다시 생각하는 <아티카의 유령들>과 소년원에 수감된 한 소년의 삶을 바라보는 <제한구역>, 신자본주의가 어떻게 감옥을 산업으로 탈바꿈시켰는지 분석하는 <처벌의 이윤> 등이 이 주제를 담은 영화들이다. 인권영화제는 사전제작지원을 통해서도 감옥 안에서의 인권을 다루고 있다. 2003년 가을 청송 보호감호소에서 가출소한 조석영은 사회보호법 폐지를 주도해왔다. 그는 <감옥탈출>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전과자라는 과거가 현재마저 규정하는 굴레가 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진정 죗값을 치른다는 건 무엇인지 묻는다. 역시 사전제작지원으로 <그림같은 집>을 완성한 이동희 감독은 전과자가 처한 불신과 경멸을 극영화의 형식을 통해 비판한다. 또한 올해 인권영화제는 어떤 매체보다 빠르게 소식을 전하는 인터넷 동영상에 주목한다. ‘넷 액티비즘’이라는 이름으로 상영되는 이 영화들은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 등 인권을 위한 싸움의 현장에서 함께해온 액티비스트들의 활동을 좀더 공적인 장소에서 공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현정 parady@hani.co.kr

아나의 아이들 Arna’s Children

감독 줄리아노 멀 카미스, 다니엘 다니엘/ 이스라엘, 네덜란드/ 2003년/ 84분

이스라엘 여인 아나는 팔레스타인 남자와 결혼해 저항운동에 헌신해왔다. 그녀는 팔레스타인 거주지 제닌에 연극학교와 극장을 세우고, 분노에 찬 아이들을 모아 그 분노를 적을 향해 발산하라고 가르친다. 몇년이 지난 뒤 ‘아나의 아이들’은 전쟁터로 변한 제닌에서 총을 들고 싸우고 있거나 이미 죽어 전사자들을 위한 벽 위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이 영화를 공동연출한 줄리아노 멀 카미스는 아나의 아들이다. 아나와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멀 카미스는 이스라엘군과의 교전 때문에 폐허로 변한 극장을 찾아 옛 시절을 떠올리고 현재와 마주한다. 열살 무렵이었던, 폭격을 맞아 무너진 집터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들. 그들은 모처럼 웃고 떠들며 연극을 준비하던 분장실에서, 총을 쏘고 친구의 죽음을 목격해야만 한다. 죽은 이를 애도하는 일조차 총알의 위협을 받아야 하지만 굴복하느니 죽겠다고, 아직 살아 있는 청년들은 단언한다. 올해 인권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한 <아나의 아이들>은 십년 전과 지금을 교차편집으로 대조하면서 살아남고 저항하는 일이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스티비 Stevie

감독 로버트 앤더스, 스티브 제임스/ 미국/ 2002년/ 140분

<후프 드림즈>의 스티브 제임스가 만든 다큐멘터리다. 제임스는 1985년 ‘빅 브러더’라는 일종의 자매결연 프로그램에 참가해 보호시설에 수용돼 있던 소년 스티비를 만났다. 스티비는 어머니에게 학대받고, 새아버지의 어머니 집에서 자란 소년. 십년 만에 다시 스티비를 만난 제임스는 그가 문제투성이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2년 뒤 다큐멘터리 <스티비>를 찍기 시작한다. 그사이 스티비는 여덟살 난 조카를 추행했다는 혐의를 받는 죄수가 되어 있다. 선댄스와 야마가타영화제 등에서 호평받은 <스티비>는 보기 드물게 개인적인 감정이 배어 있는 다큐멘터리다. 제임스는 스티비 안에서 학대받은 어린 시절과 애정없는 가족, 빈민들을 괴롭히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발견하지만, 섣불리 사회에 책임을 돌리진 않는다. 그는 죄의식과 무력감을 고스란히 싣고 망가진 스티비를 지켜볼 뿐이다. “누구도 그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는 소년”에 관한 이 다큐멘터리는 불행한 시작과 그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끝을 고스란히 수긍하면서 끝내 판단을 유보한다.

나의 혈육 My Flesh and Blood

감독 조넌선 카시/ 미국/ 2002년/ 83분

15년 동안 TV프로듀서와 리포터로 일해온 감독 조너선 카시는 “수잔과 그 아이들을 만났을 때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수잔은 장애가 있는 아이들 열한명을 입양해 혼자 돌보는 중년 여인. 그녀는 보기 드문 강인함과 유머 감각으로 선천성 질병을 앓고 있거나 다리가 없는, 혹은 화상으로 얼굴이 망가진 아이들을 기운차게 키우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 중 하나인 십대소년 조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분노를 가족에게 쏟아부으면서 이 특별한 가정은 위기에 빠진다. <나의 혈육>은 카시가 하루종일 그 집에 머무르며 촬영한 필름과 수잔이 수년 동안 찍어온 홈비디오로 이루어져 있다. 다리가 없는 소녀가 두손에 스케이트를 끼우고 빙판 위를 질주하는 장면은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대목. 갑자기 찾아온 한 아이의 죽음과 함께 <나의 혈육>은 삶을 성찰하고 미래를 묻는, 한층 깊어진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2003년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감독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영화다.

산티아고 알바레즈 다큐모음

호치민의 79봄들 Seventy-nine spring times of HO CHI MINH 쿠바/ 1969년/ 25분

하노이, 13일의 화요일 Hanoi, Tuesday the 13th 쿠바/ 1967년/ 40분

쿠바의 대표적인 1세대 감독 산티아고 알바레즈는 1969년 호치민의 장례식을 촬영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호치민의 79봄들>은 알바레즈와 그의 카메라맨 단둘이 촬영한 필름과 자료화면, 사진 등으로 구성된 영화. 미군 폭격에 노출된 호치민 시민들과 지도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 시인이기도 했던 호치민의 삶을 급진적인 스타일로 구성했다. 에이젠슈테인을 추종했고 지가 베르토프의 영향도 받았던 그는 이 영화에서도 뛰어난 몽타주 기법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에 그치지 않는다. “혁명이 나를 영화감독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던 알바레즈는 이 영화를 두고 “내 스타일은 제국주의를 향한 증오에서 나온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또 한편의 다큐멘터리 <하노이, 13일의 화요일>은 1967년 알바레즈가 하노이를 처음 방문했을 때 하루 동안 찍은 필름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영화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유린당한 베트남의 역사를 돌아보고, 베트남 전쟁을 이끌었던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을 현란한 몽타주 스타일로 비판한다.

히바큐샤-세상의 끝 Hibakusha-The End of the World

감독 가마나카 히토미/ 일본/ 2003년/ 91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전범국가이면서 원자폭탄이 부른 학살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일본은 전쟁에 관해 논할 때 기묘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다고 해서, 같은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으므로. 그러나 <히바큐샤-세상의 끝>은 국수주의적인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좀더 넓은 시선으로 핵무기와 강대국의 침략, 그 피해를 성찰하고 있다. 감독 가마나카 히토미가 국경을 넘었기 때문이다. 이라크를 찾은 가마나카는 극소형 핵무기를 비롯한 미군의 핵에 희생된 아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고통에 시달리는 소녀는 밝은 색 크레용으로 자기 마을을 그리지만, 마을과는 한참 떨어진 병원 침대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가마나카는 일본으로 돌아간다. 히바큐샤는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날 살아남은 이들을 일컫는 단어. 그 히바큐샤 중 하나인 80대 노의사와 함께, 그녀는 원폭을 제조하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행해졌던 지역 근처 미국 농민을 만나고, 또 하나의 희생자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민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죽음의 부대: 프랑스 군사학교 Death Squadrons: The French School

감독 마리-모니크 로빈/ 프랑스/ 2003년/ 59분

이탈리아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는 프랑스가 어떻게 알제리 독립운동을 탄압했는지 증언하는 걸작이다. 그 영화가 만들어지고 40년 가까이 흐른 2003년, 프랑스인 마리-모니크 로빈은 독재정권을 심판하는 아르헨티나 법정으로 건너가 조국의 역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 군인들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프랑스로부터 고문과 취조 기술을 전수받았고, 물리적인 지원도 받았다. 인도차이나 침략 무렵부터 갈고 닦은 제국주의의 기술. 그뒤를 이은 미국은 프랑스를 본받아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을 훈련시켰다.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알제리 전투>로부터 과거 필름을 빌려온 <죽음의 부대: 프랑스 군사학교>는 이처럼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전달하는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기억해야 할 역사를 기록할 뿐만 아니라 ‘왜’라는 질문 역시 던지고 있다.

기업 The Corporation

감독 마크 아흐바, 제니퍼 애보트/ 캐나다/ 2003년/ 165분

<기업>은 18세기 후반부터 성장을 시작해 공룡처럼 자라온 미국 기업을 공격하는 다큐멘터리다. 법률가이자 교수인 조엘 바칸이 작가로 참여한 이 영화는 나이키와 IBM 등을 찾아가는 마이클 무어의 <빅 원>과 달리 개별기업보다는 기업 구조의 핵심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다. 마이클 무어와 노암 촘스키 등 좌파 인사들을 인터뷰하고, 거대 기업 CEO와 마케팅 책임자를 스튜디오에 초대해 속을 털어놓게 하는 고른 진행이 돋보이는 영화. 그러나 기업 광고를 편집해 역으로 기업을 공격하는 등 유머 감각이 빛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맥도널드를 비판하는 <슈퍼사이즈 미>와 함께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가장 논란을 불렀던 영화. <기업>은 스스로를 ‘약탈자’라고 규정하는 거대 기업을 분석할 뿐 아니라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설득하는 영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