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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동안 첫사랑을 찾아 헤맨 여배우의 이야기, <천년여우>
김현정 2004-07-06

열쇠 하나와 그림 하나를 남기고 사라진 첫사랑. 그를 찾기 위해 배우가된 여인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천년과도 맞먹을 여행을 계속한다

곤 사토시는 많은 이들이 <천년여우>를 실사영화로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가져온 <천년여우>는 실사영화에도 어울리는 이야기와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곤 사토시는 그 질문에 “그림은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의 공통분모다. 나는 다른 길은 알지 못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그것이 내 아이디어와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법이다”라고 답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묻는 <천년여우>는 그처럼 만화를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밖에는 모르는 장인이 고집세게 사색해온 주제를 담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단 몇장의 그림에서 태어났지만, 치요코가 몸을 싣는 우주선처럼, 2차원의 이미지를 넘어 깊은 공간을 향해 자유롭게 시간을 타고 흐른다. 꼼꼼한 고증을 거친 <천년여우>는 화려한 제목과 어울리는 그림을 층층이 겹쳐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다.

<천년여우>는 평생 동안 첫사랑을 찾아 헤맨 어느 여배우의 이야기다. 다치바나 겐야는 삼십년 전 모습을 감춘 전설적인 여배우 후지와라 치요코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다. 아직도 치요코의 팬인 겐야는 그녀가 소중하게 여겼던 열쇠를 찾아내 그녀에게 선물한다. 열쇠를 받아든 치요코는 그 열쇠를 남긴 남자와 그 때문에 뒤바뀐 자신의 삶을 추억한다. 전쟁 중이었던 일본, 길을 걷던 십대소녀 치요코는 정부에 저항하다가 경찰에 쫓기게 된 화가와 우연히 부딪친다. 치요코는 그를 자기집 창고에 숨겨주고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를 그녀에게 주지만, 이내 경찰에 들켜 어디론가 달아난다. 치요코는 그 남자가 만주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싸우겠다던 말을 기억해내고, 그를 만나기 위해 만주에서 찍는 선전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한다. 전쟁이 끝나고 최고의 스타가 된 치요코는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첫사랑을 찾으려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천년여우>는 치요코가 출연한 영화와 그녀의 러브스토리를 뒤섞고, 겐야와 그의 조수가 과거와 영화 속에 스며들어 그 순간을 목격하는 대담한 형식을 시도했다. 치요코는 이제 그만 결혼하라는 어머니와 다투다가, 멜로영화 속으로 들어가 몸값에 매여 연인과 이별한 불행한 게이샤가 되어 흐느낀다. 그리고 겐야는 그 집 하인으로 등장해 치요코가 화가와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는 치요코는 적국의 공격을 받은 전국시대 공주가 되어 장군 겐야와 함께 말을 달리면서 포로로 잡힌 첫사랑을 구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기도 한다. <천년여우>는 이런 식으로 전쟁 중과 전후의 일본 영화사, 영화가 기록해온 일본 역사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천년여우>를 보면서 구로사와 아키라와 <고지라> 시리즈, 나루세 미키오와 미조구치 겐지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곤 사토시는 치요코에게 사랑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예언하는 물레 잣는 노파를 <거미집의 성>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전성기에 은퇴한 여배우 하라 세쓰코와 온화한 미소로 사랑받은 다카미네 히데코가 치요코 안에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이 복잡한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무라이 사다유키. 곤 사토시의 데뷔작 <퍼펙트 블루>의 작가이기도 한 무라이는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삽입했지만, 그 사건들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라 영화가 재해석한 결과다. 만주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까닭도 전쟁터였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산업이 활발한 곳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천년여우>를 영화를 향한 애정이 넘치는, 영화를 위한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곤 사토시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아이돌 스타가 등장하는 <퍼펙트 블루>에서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과연 진짜인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는 그 질문을 계속하기를 원했고, 그 때문에 배우를 주인공으로 삼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치요코가 들려주는 삶은 <퍼펙트 블루>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천년여우>에서 현실과 환상은 서로를 구분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 때문에 90분도 채 되지 않는 <천년여우>는 한 여인의 일생을 훑는 듯 풍부한 느낌을 준다. 환상이 끼어들지 않는 현실이란 없다. 그리고 <천년여우>는 그 둘을 갈라놓지 않고 한데 묶어 펼치는 경제적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곤 사토시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현실의 문제와 함께 ‘시간의 의미’에도 주목했다고 했다. 치요코는 살아가고 나이를 먹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화가를 처음 만난 순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삽입하기도 한다. 곤 사토시는 “독자가 마음대로 챕터를 옮길 수 있는 만화책과 달리, 영화에서만 가능한 동시에 존재하는 과거와 현재”를 이 영화에 담았다. 기억은 무엇일까. 첫사랑의 얼굴조차 잊어버린 치요코는 그를 굳이 만나지 않아도 좋다고, 자신은 그를 찾아다니는 여정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누구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무한의 공간으로 떠난다. 시간이 지구에서와는 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을 우주를 향해. <천년여우>는 짧고 단순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환상이 무너지고, 과거와 현재가 같은 켜를 이루는 <천년여우>는 87분을 가뿐하게 보고 난 뒤에 더 긴 시간을 들여 생각해주어야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 감독 곤 사토시

나의 관심은 오직 만화와 애니메이션

곤 사토시는 데뷔작 <퍼펙트 블루>로 주목받기 시작한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1963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곤 사토시는 무사시노 예술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재학 시절 이미 <영 매거진>에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단행본 <해귀선>을 발표한 것이 1990년. 이후 그는 오토모 가쓰히로와 오시이 마모루 등과 함께 일하면서 <노인 Z> <메모리즈> <기동경찰 페트레이버2> <조조의 신비한 모험> 등에 참여했다. 오토모 가쓰히로는 곤 사토시의 만화책 <월드 아파트먼트 호러>를 자신의 첫 번째 실사영화의 원작으로 택하기도 했다. 배경디자인, 캐릭터디자인, 연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던 곤 사토시는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메모리즈>에서 <마그네틱 로즈>를 연출했고, 1997년엔 첫 번째 장편 <퍼펙트 블루>를 만들었다. <퍼펙트 블루>는 한 아이돌 가수가 배우 데뷔를 눈앞에 두고 협박과 살인,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스릴러. 실제 인간의 신체비율과 비슷한 캐릭터디자인, 묵직한 주제, 영화적인 연출 기법 등으로 주목받았다. 두 번째 영화 <천년여우>가 드림웍스를 통해 미국에서 개봉되기도 한 곤 사토시는 2003년엔 <도쿄대부>를 완성했다. <도쿄대부>는 버려진 아기를 주운 도쿄의 세 부랑자가 아이 부모를 찾기 위해 떠나면서 겪는 모험과 화해의 이야기. 도쿄 시내를 사진으로 찍어 색을 덧입힌 뒤 배경으로 사용한 <도쿄대부>는 곤 사토시의 전작들처럼 실사영화에 어울리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곤 사토시는 자신의 관심은 오로지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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