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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꼴찌 투수의 찬란한 나날, <슈퍼스타 감사용>
김혜리 2004-09-14

이기고 싶었던, 이길 수 있었던,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어느 꼴찌 투수의 찬란한 나날.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 어린이 회원이었던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를, 그들과 청룡이 맞붙는 날이면 한시름 놓았던 팀으로 기억한다. 나와 친구들은 웬만하면 지는 그 팀을 ‘삼미 슬퍼스타즈’라고 불렀던 것도 같다. 물론 페이소스 따위를 스포츠에서 구하기에 우리는 너무 어렸다. “약체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이라 좋은 것은 패배를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라고 자랑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쿨한 수필을 읽은 것도 훨씬 나중 일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열등생과 아웃사이더는 영화의 오랜 스타다. 그들의 성취담은 영화가 스토리라는 것을 갖게 된 이래 환영받는 소재였다. 이 테마에 대한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꾸준한 매혹은 약자의 반격을 그린 내러티브에 내장된 파괴력을 증명한다. 엄밀히 말해 <슈퍼스타 감사용>의 주인공 감사용은, 복원해야 할 실존 인물이라기보다 고전적 약자 히어로의 속성을 뭉뚱그린 일종의 기호다. 과연 <슈퍼스타 감사용>은 예고편부터 셌다. 넥타이를 날리며 자전거에서 내린 후줄근한 철공소 주임이 코치에게 “제가, 감사용입니다”라고 외치는 광경만으로, 투구에 몰두한 이범수의 옆얼굴만으로 코끝이 저리기에 충분했다.

학창 시절 야구선수였으나 실업팀에 뽑히지 못하고 삼미특수강에 입사한 감사용(이범수)은 직장 야구로 꿈을 달래던 어느 날 좌완투수 없는 프로팀 삼미 슈퍼스타즈 공모에 합격한다. 그러나 건어물 가게를 하며 삼남매를 키우는 홀어머니(김수미)에게 “직장을 때려친 게 아니라 옮긴 것”이라는 아들의 주장은 믿기지 않는다. 선수가 됐으나 마운드에 설 기회는 오지 않고, 마운드에 서긴 했으나 선발 출장 명령은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벤치의 감사용은 출전한 선수들에게 항상 “자신있게! 괜찮아, 괜찮아!” 외치는데, 그것은 스스로 듣고 싶은 말처럼 들린다. 구장 매표소 직원 은아(윤진서)와 사랑이 더디게 싹틀 무렵, 기회는 벽력처럼 찾아온다. 20연승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박철순 선발 경기의 상대를 다른 투수들이 기피하는 것. “선수 같지도 않은”이라는 비웃음에 답하기 위해 감사용이 나설 때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실화가 아닌 대목에서는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영화적 클리셰를 적극 동원한다.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법 교과서에 예제로 실릴 법한 상황이 즐비하다. 달리던 감사용이 시위대열에 휘말렸다가 정신을 차리면 슈퍼스타즈의 거대한 마스코트 앞이다. 그의 발탁은 회사 구내방송으로 쩌렁쩌렁 공표되고 직장 동료였던 배우지망생은 스타가 되어 하필 감사용 선발경기 시구를 던진다. 군중에 떠밀려 억지로 스타 선수의 사인을 받는 상황도 빚어진다. 그러나 이들이 배치된 리듬은 그만큼 영악하지 않다. 직장생활의 답답함, 출전의 기다림, 선발 출전을 꿈꾸는 시간의 구획이 야무지지 못해 긴장의 상승세가 불분명하고, 여러 차례 등장하는 몽타주 시퀀스의 요점도 더 명확할 필요가 있다. 동화 같은 로맨스도 실화의 힘을 갉아먹는다. 윤진서는 좋은 피사체지만 CF 이미지 그대로 해맑기만 해서 사람이라기보다 희망의 요정 같다.

김종현 감독의 제구력은 이야기를 전진시킬 때보다 멈추어 사용의 가족과 야구팀을 ‘묘사’할 때 쾌조를 보인다. 서로의 이야기를 안 듣는 척하면서 듣고, 상대가 들은 걸 알고도 내색하지 않는 식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매우 한국적인, 사용의 집안 풍경은 김수미의 곰삭은 호연에 힘입어 관객을 설득한다. 한편 패배에 중독돼 “이기면 불안하고 역전당하면 안심이 되는” 슈퍼스타즈 선수들이 뒤엉켜 있는 더그아웃과 로커룸을 묘사할 때, 대사와 카메라 움직임에는 성실한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 영화의 긴 클라이맥스인 OB베어스 대전의 역동적 촬영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심호흡처럼 흩어지는 투수의 송진 가루와 홈베이스에 누워 하늘을 보는 주자의 미소를 잡아내는 애정어린 눈이다.

아마 <슈퍼스타 감사용>에는 두개의 길이 있었을 것이다. 삶의 양식으로서 패배를 천착하거나 아니면 이기고 싶다는 패자의 열망을 기념하거나. 후자를 택한 이 영화는 지는 데 익숙해지지 말라고, “나도 이길 수 있었다" 고 당당히 울먹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미 슈퍼스타즈와 감사용의 싸움은 철저한 패배의 맥락 위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스타의 기록 갱신이지 삼미의 1승 추가가 아니었다. 승리하고 싶다는 삼미와 감사용의 열망은 사람들이 건성으로 끄덕이면서도, 내심 귀찮아 뭉개버리고 싶어하는 종류의 진실이다. 그래서 그들의 1승은 오직 그들에게만 중요하고, 승부를 넘어선 실존적 의미를 얻는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존경할 만한 적수의 존중 속에서 100% 진력해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생의 충만한 순간에 관한 영화다. 그날 감사용은 다 이루었다. 그래서, “삼미는 1983년 전기리그 2위를 했다”는 위로 투의 에필로그 자막은, 다른 노래에서 떼어온 후렴처럼 거추장스럽다.

:: 1982년의 삼미 슈퍼스타즈

기막힌 석패, ‘도깨비’ 타력

소설가 박민규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평범한 야구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며, 유년 시절 순정을 바친 팀이 한 청년에게 남긴 ‘최하위의 심리적 문신’에 대해 써내려간 바 있다. 고교야구가 최고 인기였던 시절 잘나가는 고교팀을 보유하지 못했던 인천은 프로야구팀 창단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인천팀 1순위 후보였던 현대는 정주영 회장이 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쏟고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이 수영연맹 회장을 맡은 때라 야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프로야구 추진 주체들은 이어 한국화장품, 대한항공과 접촉했으나 유류파동으로 인한 적자 여파에 시달리던 기업들은 시큰둥했다. 결국 5개 팀만으로 출범하려던 차에, 삼미특수강이 최종 회의 6시간 전에 참가의사를 알려왔고, 슈퍼스타즈는 1982년 2월5일 창단식을 가졌다.

첫 경기는 삼성 라이온즈를 5-3으로 눌렀으나, 이후 삼미는 6연패 한 차례, 5연패와 4연패를 각각 두 차례 거듭한 끝에 10승30패로 전기리그를 마감했다. 특히 OB베어스에 8-0으로 앞서다가 11-12로 역전당한 4월25일의 충격적 패배로 박현식 감독이 물러나기도 했다. 삼미는, 그해 9월 세계 아마야구 선수권에 대비한 인천구장 공사로 전기 내내 춘천 등 지방구장을 떠돌았다. 그러나 7월17일부터 치른 인천 홈경기에서 통산 2승15패를 기록해 시민의 원성을 샀다. 후기 개막과 함께 8연패한 삼미는 1승 뒤 10연패, 다시 1승 뒤 10연패를 하고 후기 통산 5승35패, 승률 1할2푼5리의 전적을 냈다.

만루홈런으로 개막해 만루홈런으로 막을 내린 드라마틱했던 프로 원년, 기록의 왕중왕은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최소득점, 최소홈런, 최소도루, 최다실점 등 기록을 독식했고, 라이온즈 오대석의 사이클 히트, 황규봉의 경기당 최소투구, 타이거즈 방수원의 노히트 노런 상대도 삼미였다. 1, 2위 OB와 삼성에 도합 2승14패를 기록해 전력 평준화를 위한 동포 영입을 1983년으로 앞당기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삼미가 스타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상식을 넘어선 연패와 기막힌 석패는 어딘가 초월적인 데가 있었고, 간혹 폭발하는 가공할 타력은 ‘도깨비’라는 별명을 낳았다. 이듬해에는 재일동포 장명부 투수가 합류해 100게임 중 60게임을 출장해 36게임 완투 30승을 거두는 기적도 있었다. 인호봉, 금광옥, 정구왕, 감사용, 이적한 김바위 등 희성이나 특이한 이름의 선수가 많은 것도 오묘한 팀 컬러와 어울렸다. 슈퍼스타즈는 1985년 6월21일 마지막 패전을 끝으로 3년6개월간 120승4무211패의 기록을 남기고 사라졌다. 1985년 70억원에 청보식품에 매각돼 청보 핀토스로 개명됐고 1988년에는 태평양 돌핀스가 팀을 이어받았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가 돌핀스를 인수했으나, 인천 연고지는 SK 와이번스에 넘어갔다.

*자료출처: <한국야구사>(대한야구협회 한국야구위원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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