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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브레이커블’ 샤말란 스타일, <빌리지>
김혜리 2004-09-21

<도그빌>, 토마스 하디, <블레어 윗치>, 구약성서, 그리고 ‘언브레이커블’ 샤말란 스타일.

<식스 센스>(1999) 이후 반전(反轉)은 꽤 오랫동안 영화의 트렌드였다. <디 아더스> 같은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 스릴러부터 충무로 호러와 멜로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막판 뒤집기’ 기술은 위세를 떨쳤다. 급기야 “이제 반전없는 호러를 보고 싶다”는 푸념까지 나왔다. 그동안 M. 나이트 샤말란은 무엇을 했던가? 웬만하면 우아한 환멸을 표하며 180도 다른 영화를 내놓을 법도 하건만 그는 <언브레이커블>과 <싸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빌리지>에 착수했다. 미친 발명가처럼 나사 하나를 비틀면 전체가 변형되는 기계 장치를 연신 고안했다. 물론 “돈이 되니까”라고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명예욕을 지닌 감독으로서 샤말란의 태도는 가히 저돌적이다. “반전 유행은 끝났다. 경찰 불러!”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빌리지>는 꿋꿋이 만들어졌다.(*주- 이하 기사는 스포일러로 간주될 수 있는 정보를 포함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외딴 촌락. 이곳에서 선량한 원로들은 합의로 마을을 다스리고, 착한 젊은이들은 연애에 앞서 어른들의 축복부터 구한다. 하지만 이 낙원에는 금기가 있으니 마을을 에워싼 숲에 발을 들여선 안 된다는 규율이다. 숲에는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괴물이 산다. 괴물과 마을은 서로의 영역을 범하지 않는다는 협약으로 살아왔다. 주민들은 밤이면 불침번을 서고 괴물을 자극하는 붉은색을 멀리한다. 그러나 강화(講和)는 깨어진다. 모자란 청년 노아(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숲에 들어간 사실이 알려지고, 가축들의 가죽없는 시체가 괴물의 경고처럼 나뒹군다. 이때 앞으로 나선 자는, 의로운 청년 루시우스 헌트(와킨 피닉스). 고립 때문에 약도 못 쓰고 죽어간 이웃들을 애도해온 그는 숲을 건너 외지에 다녀오기를 자청한다. 그리고 공포가 진실만 남기고 모든 것을 휩쓸어간 어느 밤, 지혜로운 눈먼 처녀 아이비(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는 루시우스와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뜻밖의 재앙은 아이비로 하여금 사랑의 이름으로 사명을 떠맡게 한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빌리지>는 사전 정보가 없을수록 재미있다. “마을 주민이 유령도 외계인도 아니다”라는 식의 반전 스포일러만 일컫는 것이 아니다. 위에 쓴 평범한 줄거리도 모르고 보는 편이 낫다. 드라마가 껍질을 벗고 감정의 넝쿨이 하나씩 땅 밑에서 끌려나오는 순간들이 모두 음미할 만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군가의 칼이 누군가를 찌르는 대목에서 <빌리지>는 상황을 일으킨 감정과 리액션부터 전달하고 나중에 행위를 드러내는 역순의 연출을 택한다. 대부분 하나의 숏을 한신으로 확장하는 <빌리지>의 카메라는 마스터 숏에서 출발해 아주 느린 뱀처럼 트래킹하다가 조용한 발견의 정점을 만든다. 덕분에 윌리엄 허트, 브랜든 글리슨, 시고니 위버 같은 노련한 배우들이 등으로만 연기하는 장면도 잦다. 여기에 황색과 적색을 안전과 위험의 신호로 정한 색채 설계와 대범한 편집은 쇼크 효과를 곁들인다. 그런가 하면 가정법 시제까지 엄수하는 문어체 대사는, 불편함을 의도적으로 살리는 샤말란식 대화법의 결정판이다. 듣고 있노라면 뭔가 뒤틀려 있다는 느낌에 위장이 메슥거린다. ‘감히’ 히치콕을 선망한다는 눈총을 받지만, 사실 M. 나이트 샤말란은 그보다 플롯에서 무드를 끌어내고 무드로부터 플롯을 직조하는 데에 귀재다.

샤말란 감독은 <빌리지>에서도 여전히 사랑과 도덕, 양보할 수 없는 삶의 원칙에 대해 논한다. 전작에서 그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관객이 답답했던지 이번에는 아예 열변을 토한다(“세상을 움직이는 건 사랑이야!”). <빌리지>는 오컬트 스릴러의 두건을 뒤집어쓴 지극한 멜로드라마다.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닮은 연인 아이비와 루시우스의 로맨스는, 머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수정처럼 명징한 말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와 머리 속의 생각이 수정처럼 명징해질 때까지 침묵하는 남자의 사랑이어서 흥미롭다. 센스있고 경제적인 시나리오는 신예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의 카리스마적 연기와 더불어, 몇개 안 되는 신으로 캐릭터와 그들의 러브스토리를 납득시킨다.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빌리지>의 설정과 반전에 집중된 현지 평자들의 실망은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 확실히 <빌리지>의 결말 뒤집기는 전작의 트위스트에 비해 단순하고 예측 가능하며, 잔꾀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거꾸로 바라보면 반전이 대단치 않기 때문에 관객은 반전에 집착하지 않아도 좋다. <빌리지>의 결말은 반전이라기보다 자연스런 엔딩으로 보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그것은 영화의 주제, 인물을 움직이는 동기와 호응하며, 사건 이후 마을의 운명에 대한 샤말란 감독의 신념- 그것이 심오하냐 올바르냐와 무관하게- 과 연결돼 있다. 샤말란은 여전히 플롯이란 본래 제대로 짜면 테마, 서스펜스, 감동을 담아낼 수 있는 바구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할리우드 감독 중 하나다. 그러나 감독은 관객이 자기에게 최종적으로 구하는 것이 막판 반전이라 믿고 관객은 감독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 막판 반전이라 믿는 한, 재능과 기대의 낭비는 멈추지 않는다. 누구든 이 사슬을 먼저 끊어야 한다.

:: M. 나이트 샤말란 영화의 버릇들

샤말란이 거듭 반복하는 네 가지 원칙

M. 나이트 샤말란의 초기작 <분노의 기도> <와이드 어웨이크>를 제외하고 그가 본인의 영화사 블라인딩 엣지 픽처스에서 만든 영화만 놓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몇 가지 패턴을 살펴보자.

첫째, 샤말란 영화의 초자연적 존재는 심리적 위기를 상징하는 알레고리에 가깝다. 죽음에 대한 부정,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몸부림, 믿음을 잃은 신부의 혼란 등 우리로 치면 ‘한’과 비슷한 감정이 유령, 괴력, 외계인 습격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샤말란 영화는 알레고리를 어떻게든 기어코 실물로 보여준다. 탈선한 스파이더 맨처럼 어설프게 생긴 <싸인>의 외계인, 결국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는 <언브레이커블>의 경비원이 그랬고 이는 <빌리지>도 마찬가지다.

둘째, 샤말란 영화에서 아이는 어른의 짐이나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진실을 보는 통찰력을 지닌 우월한 존재이며 문제 해결 과정에 진지하게 참여한다. <빌리지>의 아이비와 루시우스는 성장한 샤말란의 어린아이들이다. 그들은 원로들로부터 마을을 이어받을 차세대 지도자다.

셋째, 성적 인종적 편견은 언제나 가볍게 놀림받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볍게’라는 대목이다. 예컨대 <싸인>에는 침입자의 정체를 두고 벌이는 여성 보안관과 와킨 피닉스의 승강이가, <언브레이커블>에는 만화의 가치를 몰라보는 아시아인에 대한 새뮤얼 L. 잭슨의 경멸적 대사가 있었다. <빌리지>의 여자들은 프로프즈에 훨씬 적극적이다.

넷째,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히치콕 스타일 카메오를 고집해왔다. <빌리지>에서는 뒷모습과 유리에 비친 반영만으로 결정적 장면에 등장한다. 또한 <빌리지>에서는 주인공 중 하나를 도중에 액션의 무대에서 내몰아 <싸이코>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반면 <빌리지>에 와서 무너진 패턴도 있다. <식스 센스>는 말할 것도 없고 <언브레이커블>과 <싸인>에서 플래시백은, 중요한 정보를 드러낼 뿐 아니라 정서적 중심을 잡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빌리지>는 마지막 3막에 접어들 때까지는 단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밖에도 <빌리지>가 깨뜨린 샤말란의 습관은 스타 캐스팅 관행이다. 브루스 윌리스, 멜 깁슨 같은 입가에 주름이 내려앉은 액션 히어로들이 과거의 악업을 반성하듯 명상에 빠졌던 전작들과 달리 <빌리지>는 브로드웨이에서 스카우트한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와 <싸인>의 조연 와킨 피닉스, 중견 앙상블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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