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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망을 감추는 몸짓 속의 진실, <비포 선셋>
김혜리 2004-10-19

X세대의 완벽한 원 나이트 스탠드, 9년 뒤 파리에서 2막을 열다.

아니, 그들은 6개월 뒤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이것이 9년을 끌어온 수수께끼의 답이다. 연락처도 성도 모른 채 헤어진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의 9년 뒤를 그리는 <비포 선셋>은, 로맨티스트와 현실주의자를 고루 만족시켰던 <비포 선라이즈>의 열린 결말을 비로소 닫아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진실을 알고 싶었을까? 속편을 통한 그들의 재회가 반갑지만은 않았던 것은, 제시와 셀린느처럼 우리도 1994년 6월16일 그들이 나눈 감정이 지속과 반복이 불가능한 종류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그러진 약속과 이지러진 기억,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덧없는 발돋움 외에 그들의 후일담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포개지는 삶의 어떤 순간들을 통해 기적처럼 영속하는 시간을 찾아낸다. 춤추는 어린 딸을 보는 순간, 열여섯살의 시간으로 돌아가 첫사랑 소녀의 춤을 바라보는 남자에 관한 제시의 이야기는, 링클레이터가 <비포 선셋>에서 이루려는 목표다.

비엔나의 특별한 추억을 소재로 쓴 베스트셀러 <This Time>의 유럽 홍보 투어 중인 작가 제시는 파리의 서점 구석에 서 있는 서른두살의 셀린느를 발견한다. 그가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은 고스란히 <비포 선셋>의 러닝타임이다. 둘은 여전히 소요학파(逍遙學派)이며 문답법의 열렬한 신봉자들이다. 제시는 지금도 아랫목의 철학자이고 셀린느는 자본주의의 탐욕에 분개하는 행동가다. 두 사람은 썩거나 망가지지 않았으나, 9년 동안 꾸준히 가능성의 문을 하나씩 닫아왔다. 그들은 파리의 골목과 카페와 센강의 유람선, 셀린느의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빈곤과 환경오염, 종교, 세계의 절망과 희망, 섹스와 결혼을 이야기한다. <비포 선셋>에 보석의 파편처럼 끼어드는 9년 전의 플래시백은, 두 사람의 변한 외양만으로도 관객의 가슴에 파문을 그린다. 부쩍 여윈 셀린느는 더이상 라파엘 전파 그림의 요정처럼 보이지 않는다. 머리숱이 줄고 미소가 엷어진 제시의 미간에는 흉터 같은 주름이 생겼다. 그러나 어색한 안부인사로 허두를 뗀 둘의 대화는 최면술처럼 관객을 도취시키고 심지어 후반부에 이르면 셀린느와 제시의 얼굴마저 청춘의 잔광(殘光)으로 빛난다. 그들의 대화는 특별히 현명하거나 시적이지 않다. 오히려 진실은 과장과 내숭과 열망을 감추는 허튼 몸짓 속에 있다. 더이상 제스처를 위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셀린느는 문득 말한다. “떠나던 그 아침에, 너의 턱수염에 섞인 붉은 가닥이 햇빛을 받아 빛나던 모습을 기억해.”

집시, 즉흥시인, 친절한 바텐더가 모퉁이마다 거들었던 <비포 선라이즈>에 비해 <비포 선셋>의 구조는 훨씬 작고 순수하다. 한층 용감하고 충일하다. 모든 장식은 소거법으로 지워졌고, 남은 것은 오직 다시 사랑에 빠지려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카메라뿐이다. 촬영은 어깨 너머 숏과 인물을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는 트래킹이 거의 전부다. 그래서 비엔나 여행상품까지 낳은 전편과 달리 <비포 선셋>의 파리는 여느 도시처럼 무심히 물러서 있다. 이 지점에서 <비포 선셋>의 형식은 내용과 한몸이 된다. 스물셋의 그들에게는 시간보다 공간이 중요했으나, 사랑과 시간의 인색한 유한성을 깨우친 서른둘의 그들은 쫓긴다. 빨리 말하고 빨리 걷는다. 제시가 휴대폰으로 약속을 지연시키는 동안 셀린느가 홀로 왁자한 유람선 객실을 통과해 뱃전으로 나아가는 뜻없는 장면이 불현듯 비애를 자아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포 선라이즈>의 시간은 바닥없는 잔에 찰랑이는 와인과 같았으나 <비포 선셋>의 시간은 1초 1초 우리의 심장 위를 저벅저벅 지나간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연기는 연기 같지도 않아서 어디선가 연기상을 준다면 모욕으로 느껴질 정도다. 5분이 넘는 롱테이크와 잦은 오버랩을 감당하는 대사의 완벽한 구현은 기교를 떠난 집중력과 신뢰의 산물이다. 그중에서도 히스테리를 터뜨리는 줄리 델피의 연기와 자작곡(레너드 코언의 <Take This Waltz>를 연상시키는)의 연가, 안 그런 척 시종 셀린느의 얼굴에 못박혀 있는 에단 호크의 시선 처리는 특별 언급감이다. <비포 선라이즈>에 열광한 만국의 구제불능 로맨티스트들에게 권하건대, <비포 선셋>을 만끽하기 위해 <비포 선라이즈>를 복습하는 일은 불필요하다. “우리가 섹스를 했었나?”를 놓고 제시와 셀린느가 다툴 때 더불어 아슴한 기억을 더듬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특권적인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비포 선셋>은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첫 번째 만남의 마법은 두 번째 만남이 그것을 깰까봐 두려워하게 만들었으나, 두 번째 만남의 마법은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을 평정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만든다. 구름이 비를 바라고, 여름이 가을을 기다리듯이.

:: 제시와 셀린느의 말, 말, 말

“네가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린 것 같아”

대화에 있어서는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럽지 않은 듀엣 제시와 셀린느. 9년이 흐른 뒤에도 둑을 터뜨린 강물처럼 서로를 향해 중단없이 흘러드는 그들의 대사는 링클레이터 감독과 함께 두 배우가 경험과 상념을 투영해 직접 쓴 것이다. 여기 그 일부를 기록한다. 9년 뒤 그들이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다시 다툴 경우를 대비해.

셀린느 “며칠 전에 악몽을 꿨어. 꿈에 내 나이가 서른둘인 거야. 놀라 깨보니 스물셋이더군. 안심했지. 그런데, 진짜로 깨어보니 서른둘인 거야.”

셀린느 “난 아무도 쉽게 잊은 적 없어. 누구나 저마다 특별함이 있거든. 누가 떠난 빈자리는 새 사람을 만나도 그대로 남아. 상실된 사람은 상실된 거야.”

제시 “결혼 날짜를 잡고도 네 생각뿐이었어. 결혼식장 가는 차 안에서 창 밖을 보다가 네 모습을 봤다고 생각했어. 우산을 접으며 소시지 가게에 들어가더군. 내가 미쳐가는구나 싶었지. 브로드웨이 13번가였어.” 셀린느 “나는 11번가에 살았어.”

셀린느 “너와 보낸 그날 밤 내 모든 로맨티시즘을 쏟아부어, 내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네가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린 것 같아.”

셀린느 “내가 사귄 남자들은 다 결혼했어. 나랑 끝나면 결혼하더라. 그리고는 전화해서 고맙대.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줘서. 나쁜 자식들. 왜 내겐 청혼 안 해? 거절했겠지만!”

제시 “늘 꾸는 꿈이 있어. 나는 플랫폼에 서 있고 너는 기차를 타고 내 곁을 스쳐가. 스쳐가고 스쳐가고 또 스쳐가지. 땀 흘리며 깨어난 나는 또 다른 꿈을 꿔. 임신한 네가 벌거벗고 내 옆에 누워 있어. 너는 싫다지만, 어쨌든 난 너를 만지지. 네 피부가 너무 부드러워서 울면서 깨어나면, 아내가 날 보고 있어. 그녀는 100만 마일은 떨어져 있는 것 같아.”

제시 “복권 당첨자와 전신마비 환자를 관찰한 연구 결과, 닥친 상황은 서로 극과 극인데 6개월 뒤에는 양쪽 모두 본래 성격으로 돌아가더래. 명랑한 사람은 휠체어를 탄 명랑한 사람으로 살고 뒤틀린 인간은 캐딜락과 요트 가진 뒤틀린 인간으로 살더래.” 셀린느 “그럼 난 평생 우울하게 살겠네?” 제시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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