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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누벨바그가 만든 경쾌한 코미디, 에릭 로메르 회고전
김용언 2004-10-22

10월22일부터 11월4일까지, 하이퍼텍 나다에서 에릭 로메르 회고전 열려

본명은 장-마리 모리스 쉐레지만 질베르 코르디에라는 필명을 썼다. 그는 1920년 혹은 23년에 태어났고, 다른 누벨바그 동료들에 비해 열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동료들이 데뷔작에서부터 비평적, 상업적 성공을 만끽하며 ‘새로운 물결’을 주도해나가던 시기에 훨씬 느리고 조심스럽게 에둘러가며 영화에 대한 사유와 사랑의 폭을 확장시켰던 사람, 영화에 가장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영화 속에서 묘사하고 싶어했던 사람, 그리하여 문학과 철학에 대한 깊은 지성적 사유를 영화의 존재론에 관한 정교한 해석과 함께 기어이 영상으로 옮겨오는 데 성공했던 사람, 장 뤽 고다르나 프랑수아 트뤼포만큼 각광을 받지는 못했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최후의 누벨바그’로 불리는 노대가. ‘에릭 로메르’라는 예명으로 평론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그다.

오는 10월22일(금)부터 11월4일(목)까지 하이퍼텍 나다에서, 에릭 로메르의 회고전이 개최된다. 에릭 로메르의 대표작 17편을 총망라하는 이번 회고전을 통해 에릭 로메르의 작품들이 ‘누벨바그’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운 중력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기본적으로 전부 ‘코미디’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아이러니를 깨닫고 흘리듯 실소를 머금게 되는 그 웃음의 복잡미묘한 감각의 파노라마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중 ‘도덕 이야기’ 연작은 ‘어떤 여자와 약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그녀에게 매혹되지만 그녀와의 정사는 피한 채 결국 처음의 여자에게로 돌아온다’는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이 남녀상열지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로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이 행위에 대해 생각하는 바’이자 ‘선택 가능성’에 대해 숙고하는 바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이들의 사랑은 결국 ‘무위’(desoeuvrement)에 그치기 때문이다. ‘희극과 격언’ 시리즈는 ‘말이 많으면 화를 자초한다’, ‘두 여자를 가진 자는 영혼을 잃고 두집을 가진 자는 이성을 잃는다’, ‘내 친구의 친구는 또한 나의 친구이다’라는 등의 재치있는 경구로부터 출발하여 진퇴양난의 일상사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주인공들의 상황을 은근한 풍자의 정신으로 보여준다. ‘계절 이야기’ 연작은 어찌보면 에릭 로메르의 브레송적인 감각을 한층 더 강렬하게 보여주는 시리즈이다. ‘세계에 아름다움이 있기에, 영화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내가 무언가 촬영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각 계절이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제아무리 관습적인 아름다움이라 해도 에릭 로메르의 필터를 일단 한번 거치고 난 뒤에는 삶의 소박하고도 관능적인 디테일에 관한 새로운 찬가로 바뀐다. 프랑스 혁명과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격변 앞에서 스스로의 가치관과 정체성에 대해 탐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영국 여인과 공작> <삼중 스파이>는 이제 소소한 연애담의 소우주에서 벗어나 좀더 확장된 이야기로의 변화를 꾀하는 에릭 로메르의 원숙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참, 덧붙이자면 그가 남긴 수많은 영화평론들을 묶어서 발간된 책 제목이 ‘아름다움의 취향’이라고 한다.

ps. 에릭 로메르의 향취를 좀더 진지하게 느끼고픈 사람이라면 헨리 제임스의 단편집을 미리 읽어두고 영화를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게다.

김용언 mayha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