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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어린 연인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김용언 2004-10-26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사람이 있다. 그녀와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청춘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어린 연인들의 애잔한 러브레터.

영화의 오프닝은 한 그림으로부터 시작된다. 긴 머플러를 두르고 누덕누덕 기운 토끼 인형을 꼭 껴안은 소녀가 에펠탑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하다.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토끼 인형뿐이다. 냉정한 철조물인 에펠탑은 그녀에게 어떤 위로도 건네지 않는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주변에 여자들이 많고, 스스로도 여자들과의 자유로운 관계를 즐기는 쾌활한 대학생 츠네오(쓰마부키 사토시)는 어느 날 새벽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는 유모차와 마주친다. 그 안에는 겁에 질려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또래 소녀가 타고 있었다. 소녀의 본명은 쿠미코, 하지만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 푹 빠져 있는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본떠 스스로를 조제(이케와키 지즈루)라고 부른다. 다리가 불편한 그녀는 학교를 가지 못하는 대신 할머니가 주워다 주는 책들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츠네오는 이 독특하고 고집 센 소녀에게 점점 사랑을 느끼고 몇번의 망설임과 헤어짐을 거치다 마침내 조제와 동거를 시작한다.

영화의 중간중간 멈춰지는 풍경과 공간들은 대부분 스틸사진으로 제시된다. 영화의 로케이션 장소였던 도쿄 근교의 신도시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특별한 정서를 부여한다. 사진의 대상은 그리 아름다울 것도 없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 대부분이다. 인물들은 정면으로 찍히지 않고 조금씩 초점이 날아간 상태로 혹은 테두리가 잘린 상태로 불완전하게 보여진다. 거기에는 어떤 구체적인 정보도 없다. 그러나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라면, 혹은 이 사진에 찍힌 사람이라면 이것들을 보면서 특별한 감흥에 젖을 것이다. 그것이 사진의 본질이고 또한 추억의 본질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거의 완벽한 보편성을 지니는 연애담이다. 누구나 거쳐가고 있고 혹은 거쳐왔던 청춘의 한순간의 아키타입. 서로의 첫 만남이 다른 누구보다도 특별하다고 믿고, 이것이 운명이라 믿고(혹은 믿고 싶어하면서), 서로만 있으면 그외 다른 누구도 어떤 제약도 두렵지 않았던 용감한 어린 연인들이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그 시간에 감정이 부식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마침내는 문득문득 이별 이후를 떠올리고, ‘이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남몰래 꿈꾸면서 그렇게 조금씩 멀어지는 이야기. 사실 대부분의 연애에서 이별은 그리 번개 맞은 것처럼 어떤 강렬한 반전이나 운명의 교차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미숙함 때문에, 첫 느낌의 강렬함이 사라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치기와 어떤 죄책감 때문에 단지 외면하고 있었을 뿐. 그리하여 마침내 이별이 예기치 않게 내리친 것과 같은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일 뿐, 이별은 언제나 우리의 연애 속에 잠재하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이누도 잇신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극중에서 여주인공의 입을 빌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1년 뒤>를 들려준다. 마치 준비하고 있으라는 듯, 사랑을 믿지 못할 필요는 없지만 사랑을 완전히 믿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흥미로운 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이창동의 <오아시스>와 똑같이 장애인 여성의 사랑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한편으로 달콤하고 애잔한 동화의 정서를 잃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영화 속 조제의 모습은 말하자면 현대의 성인판 <인어공주>의 그것이다. 불편한 다리를 감추기 위해 언제나 긴 치마를 입는 그녀는 의자 위에서 털썩 뛰어내린 뒤 바닥에서 질질 끄는 소리를 내며 기어 다닌다. 만약 인어공주가 현대에 등장하여 육지의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리고 왕자 역시 그녀에게 호기심 반 연민 반으로 이끌리게 되었다면, 그 사랑에 감동한 나머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줄 것이라 믿고 용감하게 그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되었다면, 둘이 함께 살게 되었더라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감히 ‘자신과 다른’ 존재를 사랑했던 인어공주는 마침내 버림받은 채 홀로 육지에 남을 수도 바다로 돌아갈 수도 없이 그저 공허하게 부유하는 기이한 존재로 남지 않았을까. 하지만 영화 말미에서 홀로 휠체어를 끌고 다니고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물고기를 요리하여 혼자만의 만찬을 준비하던 조제의 담담한 표정은, 인어공주의 순정의 비극도 아닌 또는 현실의 막강한 장벽에 부딪혀 끔찍한 좌절을 겪어야 했던 <오아시스>의 공주의 비극도 아닌, 혼자 버텨내야 할 막막한 시간의 무심함을 견뎌가는 나름의 꿋꿋함을 보여준다.

담담하게 절제하는 러브스토리의 두 주인공을 맡은 어린 배우들의 연기가 눈부시다. 잘생기고 활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배려 잘하는 대학생 츠네오 역을 맡은 쓰마부키 사토시(<워터 보이즈>의 그 주인공)는 적당히 이기적이고 힘들 때면 도망치고 싶어하는, 시간의 마모 앞에서 어찌할 바 몰라하는 청년의 모습을 매끄럽게 보여준다. 굳이 비교하자면 <고양이를 부탁해>에서의 배두나와 이요원의 모습을 합쳐놓은 듯한 이케와키 지즈루의 싱그러움은 단순히 예쁘고 달콤하기만 했던 대부분의 영화 여주인공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매력을 과시한다.

::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과 일본 밴드 쿠루리

귀를 솔깃하게 하는 영화 속 그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이름들이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과 쿠루리가 바로 그 주인공. 먼저 지난 9월24일 향년 69살로 사망한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영화의 전반적 분위기와 여주인공 조제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이다. 그녀는 1935년 태어나 소르본대학 재학 중이던 18살 때 발표한 소설 <슬픔이여 안녕>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어떤 미소> <1년 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의 작품을 통해 연애가 진행되는 중의 씁쓸함과 잔혹함을 가감없이 응시하는 독특한 시선으로 인기를 모았다.

1996년 데뷔하여 영미 인디 록 신의 음악들을 일본적 특성과 잘 조화시키며 모던록 계열의 서정적인 음악을 사랑하는 수많은 팬들에게 잘 알려진 일본 밴드 쿠루리는 일본 음악깨나 듣는다 싶은 한국의 팬들에게도 조용한 화제가 되고 있는 팀이다(혹자는 서슴없이 21세기 일본의 록을 짊어질 인재들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약간 맥없이 나른하게 읊조리는 풍의 보컬 기시다를 포함한 4인조 밴드인 쿠루리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O.S.T에 수록된 엔딩곡 <하이웨이>를 통해 도시적인 쿨함과 서정적인 고독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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