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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의 격투와도 같은 삶, <역도산>
문석 2004-12-14

조선인 김신락과 일본인 모모타 미쓰히로를 넘어 ‘세계인’ 역도산이 되고자 했던 한 사내의 격투와도 같은 삶. 그에게 링은 세상이었다.

역도산은 수수께끼와 같은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그가 활동했던 일본에서조차 그의 진실은 논란거리였다. 80년대까지 그의 출신지(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는 밝혀지지 않았고, 그가 펼친 승부는 항상 극적이었지만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따른 쇼라는 소문을 늘 꼬리표처럼 붙이고 다녔다. 링 위에서 그가 보여준 열정은 비즈니스, 그러니까 돈에 대한 집착과 간혹 혼동됐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암흑세계의 그림자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품게 했다. 특히 그의 돌연한 죽음은 단순사고에서부터 야쿠자의 계획범행, 의료사고, CIA 음모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추측을 낳았다. 결국, 뛰어난 레슬러, 비정한 사업가,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난봉꾼, 어린이를 사랑했던 스타 등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도산의 얼굴은 지금까지도 제각각으로 존재한다.

‘역도산의 진짜 얼굴은 무엇인가.’ 송해성 감독의 <역도산>이 던지는 질문은, 때문에 자못 의미심장하다. 역도산의 39년 인생 중에서도 가장 극적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야쿠자로부터의 피격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것 또한 역도산의 맨 얼굴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자동차 안에서 피가 철철 새나오는 배를 움켜쥔 그의 만감 섞인 표정은 이 영화가 상식적인 영웅 이야기로 흐르지 않을 것을 예고한다. 죽음이라는 그림자 아래서 ‘삶’이란 한 글자를 떠올리는 역도산의 모습은 ‘역도산은 영웅이다’라는 신화를, 선입견을 버리고 영화 속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

영웅신화라는 비단포를 벗긴 역도산의 삶은 생존 그 자체만을 위한 치열한 쟁투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인이라는 낙인 때문에 스모계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 스모계의 거물 칸노 회장의 눈에 들기 위해 사기극을 꾸미거나, ‘세계인의 스포츠’ 프로레슬링을 익히고 난 뒤, 일본 최초의 경기를 앞두고 상대방인 미국 선수에게 돈 봉투를 건넴으로써 ‘전후 일본 최고의 스타’가 되는 그의 행동은 비열하기 짝이 없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그로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릴 적 일본으로 건너와 온갖 차별과 수모를 견디며 살아가야 했던 그에게 세상은 정글이요, 전쟁터였기에 역도산은 스스로 야수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살벌한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점점 광포해지고, 마침내 지킬 박사로 돌아오지 못하는 하이드처럼 금단의 선을 넘고 만다.

<역도산>은 “성공하자, 성공하면 웃을 수 있다. 아니 웃으려면 성공하자. 일본에서 가장 많이 웃는 사람이 되자”는 소박한 소망을 품었던 그의 얼굴이 결국 기괴하게 일그러지게 된 과정을 거친 숨결로 묘사한다. 전작 <파이란>에서 그랬듯, 송해성 감독은 남성적 감성의 멜로에 강한 면모를 보인다. 역도산과 칸노 회장 사이의 애증이 그런 점을 잘 드러나는 대목. 애초 칸노는 역도산을 자신의 ‘경주마’쯤으로 생각했고, 역도산 또한 칸노를 신분상승을 위한 수단 정도로 여겼으나 둘은 차츰 가까워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의사(疑似) 부자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역도산이 칸노의 품을 벗어나려고 꿈틀대면서 두 남성의 정면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자칫 단순하게 사건을 나열하는 데 그칠 수도 있었을 이 영화는 두 남성의 불꽃 튀기는 대립을 통해 팽팽한 긴장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역도산과 칸노의 긴장에 비해 역도산과 부인 아야의 이야기는 다소 느슨하다. 아야는 역도산의 순수했던 얼굴을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로, 영화의 또 다른 축을 이루지만,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도리어 가빠지는 호흡을 가로막는 인상마저 준다.

완성도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역도산>은 85억원이라는 제작비가 그리 아깝지 않은 수준이다. 60∼70년대의 컬러사진을 보는 듯한 미묘한 색감이나 생동감 있는 레슬링 장면, 빈틈없는 미술, CG작업 등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뇌리 한구석을 덥석 붙잡는 설경구의 몸을 던진 연기는 물론이고, 완벽에 가까운 감정의 완급을 통해 물 흐르는 듯한 연기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칸노 역의 후지 다쓰야(<감각의 제국> 등)는 전율을 만들어낼 정도. 아야 역의 나카타니 미키 또한 일본 최고 수준의 여배우답게 절제력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역도산>은 오히려 보고 난 뒤 뒤통수에 ‘그런데 역도산이 누구였지?’라는 물음표를 매달게 하는 영화다. ‘죽을 힘을 다해 일생을 살았다’는 점 외에 역도산의 실체는 가물가물해진다. 특히 샤프 형제와의 첫 경기 이후의 역도산은 더욱 어슴푸레하다. 혹시 그건 역도산의 내면을 발가벗기는 데만 힘을 기울인 나머지 그가 보여줬던 다양한 표정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딱 한번뿐인 인생, 착한 척할 새가 어딨냐”, “역도산은 울지 않는다. 눈물이 흐를 뿐이다”, “난 일본이고 조선이고 그런 거 몰라. 난 역도산이고 난 세계인이다” 같은 멋진 대사들이 주인공의 입에서만 맴돌 뿐, 캐릭터를 통해 육화되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 역도산에 관한 책들

역도산의 다양한 면모를 조망한다

역도산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일본에선 그에 관한 서적이 150종이 넘게 출간됐지만 한국에서는 10종 남짓한 상태. 그중 상당수는 영화 <역도산> 개봉에 힘입어 서점으로 나오고 있다. 역도산에 관한 책 중 가장 객관적이고 공을 들였다고 평가되는 <영웅 역도산>(미다스북스 펴냄)은 재일동포 3세 이순일의 집요하면서도 꼼꼼한 취재가 돋보인다. 역도산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함경남도 용원까지 가서 친지를 만났을 정도로 다양한 증언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장점. ‘조선(북한)’ 국적을 가진 탓인지 역도산이 김일성에게 벤츠를 선물했다거나 북한에 두고 온 딸과 상봉했다는 이야기를 정설에 가깝게 담고 있다. <조선청년 역도산>(북@북스 펴냄)은 나오키상 수상자인 일본 작가 무라마쓰 도모미가 역도산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과 당시 언론 보도를 엮어 만든 책이다. 일본 열도를 뒤흔든 1954년 역도산 대 샤프 형제의 경기부터 각종 시리즈, 세계 타이틀에 대한 역도산의 계속되는 도전 등 주로 링 위의 역도산에 초점을 맞췄다.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진면모를 확인하게 해주는 책. <내 남편 역도산>(자음과 모음 펴냄)은 1963년 세간의 관심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역도산의 세 번째(또는 네 번째) 부인인 다나카 게이코가 쓴 책이다. 일본항공 스튜어디스였다가 사진 한장이 역도산에게 전해지면서 결혼까지 하게 된 다나카는 역도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정리한다. 다른 대목보다는 역도산의 가정생활이 상세하게 묘사된다는 점이 흥미롭고 풍부한 사진이 볼거리다. 역도산 사후 40주기인 2003년 12월15일 출간된 <역도산이 왔다>(아이디오 펴냄)는 딴지일보 등에서도 활동했던 프로레슬러 김남훈이 역도산과 관련된 13개의 미스터리를 알게 쉽게 정리한 책이다. 여러 방면의 출처에서 나온 역도산에 관한 정보가 녹아들어 있어 ‘역도산 입문서’로 적합하다. 한편 1995년 북한에서 출간된 만화 <세계 프로레스링 왕자 력도산>(김태권 작)도 모두 싣고 있어 더욱 재미를 준다. 미국 레슬러들과 상대했다는 이유로 역도산을 ‘반제국주의자’로 바라보는 북한의 시각을 엿볼 수 있으며 역도산이 일생 동안 뛰어넘고자 했던 NWA 챔피언 루 테즈와의 경기가 상세하게 묘사된다. 이외에도 <인간 역도산>(구리타 노보루 지음/ 엔북 펴냄), <소설 역도산>(김선영 지음/ 태일출판사 펴냄), <반역의 레슬러 역도산>(고두현 지음/ 한나래 펴냄) 등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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