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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사극의 주춧돌을 놓다
2001-06-27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24 이진섭 (1922∼83)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마흔을 넘긴 독자들이라면 어느 쓸쓸한 황혼녘에 한번쯤은 나직이 읊조려보았을

법한 옛노래다. 박인희의 목소리로 귀에 익은 이 애잔하고 감상적인 노래 <세월이 가면>의 가사가 본래 박인환의 시(詩)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노래의 작곡자는 누구였을까? 그저 막연히 한국전쟁 직후 폐허로 변해버린 명동거리의 선술집 어느 한귀퉁이에서

누군가에 의해 불리기 시작한 이후 세대를 거듭하며 구전되어온 노래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화인을 비롯하여 당시 명동의 선술집들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모든 원로예술가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세월이 가면>에 곡을 붙이고 그것을 노래로 부른 최초의 인물은 바로

시나리오 작가 이진섭이다.

서울토박이인 이진섭은 경복고를 거쳐 서울문리대에 진학했으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학업을 중단하고 당시 처음 생겨난 서울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입사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기의 그는 신문기자였다. <국제신문> 문화부에서 시작해 <조선일보> 외신부를

거쳐 <경향신문> 정경부장까지 올랐으니 언론계의 관행에 비추어볼 때 무척 빠른 승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기를 거치면서

그는 언론계의 생활만으로는 자신의 창작열을 담아낼 수 없다고 느꼈는지 예술계로의 진입을 모색한다. <세월이 가면>에 곡을 붙여 동시대인의

가슴을 어루만지게 된 것도 대체로 이즈음인 1956년 정도로 추정된다. 37살이 되던 해인 1958년, 그는 마침내 언론계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안양촬영소 기획실장 겸 전속작가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창작자의 길로 들어선다.

시나리오 데뷔작은 홍콩의 밤거리를 배경으로 하는 액션과 청춘남녀의 러브스토리를 짜깁기한 정창화 감독의 <망향>. 당시 유행하던 한국판

필름누아르라 할 수 있는데 별다른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이진섭이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과시하기 시작한 작품이 <대원군과 민비>.

요즈음 안방극장을 사로잡고 있는 이미연 주연의 <명성황후>와 동일한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민비(명성황후)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김지미다. 정사(正史)에 충실하면서도 극중 캐릭터들을 깊숙이 파고들어가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팽팽히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진섭의

시나리오작법은 이후 <묘향비곡>과 <십년세도>로 이어지며 훗날 신봉승이 완성한 것으로 평가되는 조선시대 정통사극의 기초를

마련한다. 이만희의 <묘향비곡>은 조선 중기의 당쟁사를 배경으로 하되 당쟁의 주역들이 아닌 서민들의 고통을 집중묘사함으로써 민중사적

사관이 돋보이는 작품이고, 임권택의 <십년세도>는 조선 후기 영조시대의 간신 일당들을 중심에 배치하여 권력의 위악성과 무상함을 처연히

증언하는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곤 하는 <순교자>는 재미작가 김은국의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다루었으되 단순한 흑백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신과 인간의 관계며 진정한 순교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만드는 당대의 수작이다. 이진섭은 평생 10편 남짓한 시나리오를 남겼을 뿐인

과작의 작가다. 그러나 시나리오 이외에도 다방면에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던 정력적인 작가였다. 시나리오와 거의 동시에 시작한 라디오드라마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십년세도>나 <방울대감> 등은 모두 당시 대단한 청취율을 자랑했던 자신의 드라마를 각색한 작품이다.

희곡작품으로는 <성녀> <민중의 적> <오해>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문공부 영화자문위원으로 재직시 끊임없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대종상’이라는 명칭을 작명한 것도 그였다. 세월은 가도 사랑은 남는 것? 애잔한 유행가 가사는 그렇게

가슴을 쓰다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과거 그가 사랑했던 작품들을 현재 우리는 볼 수 없고 그래서 그의 이름은 자꾸 잊혀져만 간다.

심산/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58년 정창화의 <망향>

1959년 유진식의 <대원군과 민비>

1959년 한형모의 <가난한 애인들>

1964년 이만희의 <묘향비곡>

1964년 임권택의 <십년세도> ★

1965년 유현목의 <순교자> ★

1966년 이강천의 <계룡?gt;

1968년 나봉한의 <방울대감> ★

1968년 최인현의 <자주댕기>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