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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감독, 일본영화는 못 만든다
2001-06-27

일제의 통제정책을 거부하고 메가폰을 놓다...이규환 감독편 下

<무지개>를 끝내고 생각한 시나리오가 <나그네>이다. 신코(新興) 키네마와 합작할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일문으로 번역해서

스즈끼 주기치를 찾아갔다. 스즈끼는 아침 일찍, 잠옷을 입은 채로 시나리오를 훑어보더니 해보자고 하는 것이다. 바로 그의 차를 타고 오이스미

촬영소(신코 키네마에 속한 촬영소- 필자) 소장을 만나 어떤 조건으로 합작을 할 것인지 상의하였다. 나는 그때 합작만 다행으로 생각하였지 비즈니스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만 조선 흥행권만 우리가 갖고 그외의 흥행권은 전부 일본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내 앞에 유능한 프로듀서만 있었다면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상해, 만주 일대, 하와이, 일본 전국에 <나그네>를 돌려서

신코 키네마가 큰 재산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나그네> 촬영을 끝내고 일본으로 갈 때 나운규씨가 작고를 했으니까 37년 개봉이다.

<나그네> 세트 촬영을 하러 일본에 갔을 때 그 환영이 대단했다. 기자들이 배우 문예봉한테만 인터뷰를 하는데 그녀는 일본말이라고는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스미마셍밖에 몰랐다. 문예봉이 김신재 여사만큼만 일본말을 했더라도 일본영화에 출연했을 것이다. 오이스미 촬영소 근방 아담한

문화주택에 숙소가 정해졌고, ‘성봉영화원 촬영 대합숙소’라고 간판을 붙여놨다(성봉영화원(聖峯映畵院)은 이규환 감독이 만든 영화사- 필자).

촬영장에서 스즈끼 주기치가 도움은 되었지만 지나치게 간섭을 하려고 했다. 20년 만에 그를 만났을 때 대뜸 “지금도 그렇게 고집 피우냐”고

할 정도로 나의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나그네> 검열을 하러 갔을 때 거기서 <무지개> 원판을 훔쳐간 후카가와 히라시(지난호

참조- 필자)를 만났다. 대본을 보니 각본·감독에 내 이름을 빼고 지 이름을 쓱 써놓았다. 그걸 보니 화가 나서 따귀를 한번 정면으로 내리쳤다.

<무지개>에 음악을 넣고 말을 넣어 해설판 발성영화로 변모시킨 것이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일본감독협회가 후카가와 히라시를 불러

체면을 손상시킨 것에 대한 징계처분으로 시말서를 받았다고 한다.

"세계가 좋아하는 사탕 같은 영화를 만들어라"

<군용열차>(1938년작. 이 영화의 시나리오 역시 이규환 감독이 직접 썼다.- 필자)를 일본과 합작한 후에 생활난으로 고생을 할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하루는 어머니가 “너를 위해 내 일생을 고생했는데 끝으로 내 소원 하나 풀어줘야 할 것 아니냐” 하시며 결혼할

규수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때 나는 한국영화계 꼴을 보니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도저히 안 될 판이었기에 독신으로 지낼 생각을 했었다. 사진을

보았는데 얼굴에 악귀가 없고 어머니가 맘에 들어 하시니 결혼을 하게 되었다. 며느리를 얻어 흡족한 생각을 가지고 돌아가신 것으로써 그동안 불효에

대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새 출발>(1939년 개봉- 필자)을 시작하기까지 쉬는 두해 동안 생활난을 겪었다. 그때 전창근 감독이 <복지만리>를

부산서 촬영했고 나는 낙동강변에서 촬영을 했는데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사탕을 한 바구니 사서 <복지만리> 촬영소에 보내는데 거기다

내가 뭐라고 썼는고 하니 “사탕은 당분이라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모두 좋아하니 전형이 만드는 <복지만리>가 사탕 모냥으로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길 바란다” 하고 보낸 일이 있었다. <새 출발>은 나중에 조선영화주식회사 전무로 가게 될 오영석이 단독으로 제작하였고

양세웅이 촬영하였다. 제작비는 2500원 정도 들었고 정식으로 개런티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대강 50원 정도 받았다(정식으로 개런티가 책정된

것은 1942년 이후다.- 필자). <새 출발>의 대강 줄거리는 형제가 유산을 두고 다투다가 아버지가 모든 걸 던져버리고 고향을

떠난 뒤에 화합해가는 얘기다.

그 다음 41년에 만든 것이 양세웅이 촬영을 하고 이화삼, 전택이, 문예봉이 주연을 한 <돌쇠>이다. 원작은 연극배우 이화삼이 좌익

관계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같이 복역하고 있던 사람에게 들은 얘기를 쓴 것이었다. 무뚝뚝한 고아가 어느 여성에게 애정을 보냈으나 결코 이루어지지

않고 서글프게 인생이 흘러갔다는 얘기다. 이 작품이 나의 일제시대, 해방 전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돌쇠>는 어느 전기공의 순정을

그린 내용인데, 마지막 클라이맥스의 대사 ‘에이 망할 놈의 세상!’이 용케도 검열 통과되어 그 암유성을 강조했던 이 감독은 그날 밤 주량을

과시했다고 한다.”- 유현목, 이규환의 생애와 예술, <영화> 1991. 5월호, p.27).

영화를 만드느니 차라리 징용을 가겠다

<돌쇠>를 끝내고 나니 43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영화통제주식회사를 만들었다(이규환 감독은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시종 일관 조선영화‘통제’주식회사로 지칭하고 있다. 일제는 1940년에 검열 통제에 관한 기존의 법률들을 총망라하여 ‘조선영화령’을 발표한

후 모든 영화사를 통폐합하고 ‘조영’을 발족시켰다. 이때 이후 조선 내부에서의 자율적인 영화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필자). 하루는 조영

제작부장이 날 만나자고 했다. 스즈키 주기치에게 “통제주식회사가 되거든 이규환 감독 잘 좀 취급을 해다오” 하는 부탁을 받았던 모냥이다. 난

“만날 필요 없으니 못 본 것으로 해달라”고 하였다. 일본옷 입고 일본말 하며, 밥먹기 위해서 굴욕적으로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 조선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고생해왔는데 우리 영화를 안 만들고 일본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 토목청부업하는 데 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가서 한번 넓은 들판에 구름이나 쳐다보고 막걸리나 마시고 소리나 지르고 그렇게 지내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또 한 가지 다른 생각은 만주영화협회(만주국에 설치된 국책영화사이지만 사상적, 민족적으로 다양한 영화가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필자)에 조선영화부를 만들어볼 계획이었다. 한국영화 배우를 들여다가 제작을 해서 만영을 통해 배급을 할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고 고생만 진탕하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생활은 생활대로 절망에 들어가는데 우연히 길에서 홍개명 감독을 만났다. 홍개명을 비롯해 윤봉춘, 이구영, 안종화, 전창근도 통제주식회사에 가담하지

않았다. 가끔 만나서 얘기도 하던 사이었는데 모두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는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하여간 그때 홍개명이 김소랑의 극단 ‘건설무대’에

연출자리를 소개하였다. 그래서 같이 함경도를 비롯해 경기도 등으로 순회공연을 돌아다녔다. 경상남도 순회를 마치고 돌아오니 징용장이 나와 있었다.

이때가 해방되기 꼭 1년5개월 전이었다.

평택 징용장에 도착한 첫날은 머리 빡빡 깎고 담요, 징용복 하나씩을 받고 군대로 소속되었다. 거기서 고생한 것은 참 상당히도 길다. 일이라는

것은 순전히 별보고 나가서 별보고 들어오는 육체노동이었고 해군식 훈련을 받았다. 하루는 위문단의 연극공연이 있었는데 여배우들이 많이 왔었다.

공연 끝난 밤, 지난 일들이 생각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군조가 날 불렀다. 연회를 하는데 여배우들이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한 모냥이었다.

연회장에 가니 여배우들이 나를 잡고 울길래 여기는 이규환 감독이고 뭐고 안 통하니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하였다. 내가 감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대장이 술에 취해서는 단둘이 얘기 좀 하자는 것이다. 그놈 방에 들어가보니 버쩍버쩍하게 만들어놓고 어디에서 쇠고기가 났는지 진수성찬이었다.

그러더니 연필과 종이를 주며 징용장에서 느낀 불만을 쓰라는 것이다. 술도 취한 김에 불평을 말해버리고 노래도 부르며 될 대로 돼라 그런 생각으로

한바탕 놀았다. 그리고 이틀 후에 반장을 시켜주어서 그전보다 형편이 나아졌다.

그러다가 8월14일 천황인가 하는 그 녀석이 5분 방송으로 공사 중지라고 발표하였다. 8월15일에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차 안에서 대한독립만세

부르는 소리가 참 굉장했다. 난 그냥 앉아서 팍팍 울기만 했고, 나머지 감동은 상상에 맡긴다. 밀짚 벙거지 하나 쓰고 서울역에 내리니 학생들이

태극기 들고 만세를 부르는데 그 물결이 굉장했다. 돌아와서 처음 만난 이들이 안석영과 전창근이었다. 전창근 집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며

이제 다시 영화를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월탄 박종화 원작의 <나라를 찾자>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때 제작비는 신경쓰지 않고

거족적으로 작품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결국 작품이 안 됐다.

해방 후에 <똘똘이의 모험>(1946), <그들의 행복>(1947), <민족의 새벽>(1947), <춘향전>(1955-

이 작품이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전후의 한국영화 제작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필자) <심청전>(1956), <청춘비가>(1958),

<애련의 꽃송이>(1959), <>(1962), <낙화암과 삼천궁녀>(1960), <상처받은 두 여인>(1963)까지

전부 합쳐 영화에 관계를 두고 22작품을 한 셈이다(이영일 선생과 대담한 이후에 만들어진 <배따라기>(1973), <남사당>(1974)을

합쳐 전체 연출작은 24편이다.- 필자). 지금 생각하면 기회를 놓쳐 후회되는 일들이 몇몇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도 나의 고집센 영화 인생과

함께 다 지난 일이 되었다.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정리 안선주/ 중앙대 영화과·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babtong8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