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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연인에서 속깊은 배우로, <B형 남자친구>의 이동건

“최악이죠. 앞이 캄캄해요.” 영화 <B형 남자친구>와 드라마 <유리화>의 촬영이 릴레이로 이어진 어느 밤에 만난 이동건에게 두 작품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묻자, 덜컥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화면으로도 얼굴이 많이 안돼 보였던 이동건은 입은 옷이 휘휘 돌아갈 정도로 살이 빠져 있었다. 얼굴에도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피곤한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우리 메이컵팀이 고생이죠.” 올해 중반 <파리의 연인>으로 ‘만인의 연인’이 되고 나서, 소신껏 선택한 두 작품이 맞물리면서 ‘과부하’가 걸린 탓이다. “다행인 건 캐릭터 잡아가는 기간이 겹치지 않았다는 거예요. 영화 캐릭터 잡고 나서 드라마를 시작했거든요. 드라마도 초반에 많은 걸 보여준 상태라 지금은 부담이 덜해요. 몸이 힘든 건 참고 견디면 되지만, 결과 나오면, 후회하게 될까봐 그게 걱정이죠.”

이동건은 올해 참 많은 일을 겪었다. 첫 주연작 <낭랑 18세>에서 가문에서 점지한 앳된 소녀를 아내로 맞는 검사로 눈길을 끌더니, <파리의 연인>에서 외사랑의 아픔을 절절히 전하며, 급속히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패션, 행동, 대사, 모든 게 화제이고 유행이었다. 특히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자기 가슴에 대고 “이 안에 너 있다”고 고백했을 때, 뭇 여성의 마음이 녹아내렸더랬다. 그가 ‘눈 오는 날 데이트하고 싶은 남자’, ‘연말 술자리에서 흑기사가 돼주길 바라는 남자’로 꼽히는 것도, <파리의 연인>에서의 로맨틱하고 순정적인 남자 수혁, 그 이미지의 여운 때문이다. 이동건의 영화 데뷔는 그러니까, 시간문제였다. 이동건이 <파리의 연인> 이후 받아든 시나리오가 50∼60권에 이른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결국 그의 ‘낙점’을 받은 영화는 <B형 남자친구>였다.

“<파리의 연인>에서 워낙 어둡게 끝나서, 캐릭터가 어두워지는 게 부담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밝게 풀어가보자, 많이 웃고, 사랑받는 역할을 해보자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동안 사랑받지 못하는 역할(<네 멋대로 해라> <상두야 학교가자> <파리의 연인>)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역할, 드라마에서 못 보여줬지만 나에게 있는 모습을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시나리오가 매력이 있었고, 상대역에 대한 호감도 있었고, 영화 작업은 여유있다고 듣기도 했고, 상황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또 그동안 착하고 바른 남자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 많이 배우고, 많이 누리고, 많이 갖고 있는, 지극히 메이저적인 역할. 수혁으로 착하고 부드러운 남자를 탈피했다면, 이번엔 바른 남자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겠다 싶었죠. 내 안에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싸가지나 근성이 있을 거거든요. 자주 보여주지 못한 부분들, 내가 원했던 다양한 면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끌렸어요.”

그런데 자타공인 ‘원단 A형’인 이동건으로서는 “이기주의와 싸가지의 극치”로 타입화된 B형 남자 영빈을 연기하기가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특이하고 못돼서 매력적으로 보이는 B형 남자라지만, 너무 못됐다 싶은 막말과 행동에 반감이 일더라는 것이다. “이거 너무 나쁜 놈 아니냐, 그러면 감독님은 B형이 원래 그렇다 그러세요. 촬영 중반쯤엔 B형이 너무 이슈화돼버린 거예요. 영화가 나오면, 다 아는 걸 또 보여주는 식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죠. 거기서 오는 혼돈이 있었어요. 감독님은 더 세게, 더 못되게 표현하길 원하시고, 저는 나름대로 지키고 싶은 선이 있고, 그래서 아직도 대화하면서 맞춰나가는 중이예요.” 조용히 관망하는 스타일이라고는 하지만, ‘아니다’ ’모르겠다’ 싶은 대목에선 목소리를 높일 줄도 아는 소신과 강단이, 그에겐 있었다.

하긴, 우리가 이동건을 제대로 알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얼굴에 솜털 보송보송하던 학생가수 이동건이 쇼프로 MC와 시트콤 연기자로 활동하더니, 언제부턴가 ‘연기자’의 무게감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외양도 이미지도 많이 달라졌다. 1집 활동과 <광끼> 출연 무렵엔 ‘범생’이자 ‘샌님’ 같은 느낌이었고, <세 친구>에서 이의정의 단순무식한 남친일 적엔 저런 ‘엉뚱함’도 있구나 싶었지만, 이후로 그에게 따라붙은 건 주로 ‘엘리트’와 ‘바람둥이’ 이미지였다. 상실의 아픔으로 어두워지고 파괴적으로 돌변하는 수혁에 이르러서는, 그 안의 ‘어둠’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밝고 엉뚱하고 재밌는 면은 저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요. 어둡고 외롭고 쓸쓸한 면이 더 크죠. 내가 가진 걸 보여주고자 했던,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해요.” 얼마 전엔 ‘가수 은퇴 선언’과 함께 연기에만 매진하겠다는 이야기가 보도되기도 했다. 앨범 홍보를 위해, 노래하기 위해, 연기를 시작했다던 이동건이 ‘연기자 선언’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그 얘기라면 밤을 새도 모자랄 거라고 했다.

“가수로 데뷔했는데, 알려지긴 시트콤으로 알려져서, 노래도 못하고, 연기도 못하는 상황이 됐어요. 심경이 복잡해져서, 2년 동안 쉬었어요. 술도 많이 먹고,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생각을 많이 했고, 변하게 된 것 같아요. 저는 흔히 말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적이 없어요. 얼토당토않은 수식어죠. 내가 뭔지 모르면서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게 끔찍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공백을 가진 거였죠. 하나로 거듭나야 한다면 연기자여야 할 것 같았어요. 내가 가야 할 길은 이 길인데 자꾸 다른 길을 가려고 하니까, 쓰러지고 지치는 게 아닐까, 이쪽에서 오라고 하는데 한번 가보자, 대신 끝까지 가보자 마음먹게 된 거죠.”

데뷔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그는 ‘배우 이동건’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대신, ‘인간 이동건’을 잃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피곤했기 때문일까, 늦은 밤이었기 때문일까. 한참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을 만끽해도 좋을 지금, 그는 두발을 단단히 땅에 디디고 서 있었고, 심지어 땅밑을 파고들어가 동면을 취할 태세를 보이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내년 달력은 비어 있다. 항간에 떠도는 입대 계획은 적어도 내년엔 없다고 했다. “내년은 별 활동 안 할 생각이에요. 막연히 이런 거다, 저런 거다, 말씀드리긴 좀 그러네요. 다만 이동건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구나, 상상 못했던 그 무언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기가 될 것 같아요.” 짧은 시간에 아주 솔직하고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쏟아낸 이동건이 올해 스물다섯살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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