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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금전 | 호금전 감독의 작품세계
2001-06-29

부천영화제에서 회고전 열리는 호금전 감독의 작품세계

정성일/ 영화평론가

아직도

읽히고 있는 <영화에 관하여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에서 홍콩 무협영화 <협녀>가 영화사상 ‘아흔한편의 고전’을 선정하는 자리에서 31위에

등극하였다. 그건 심지어 펠리니의 , 막스 오퓔스의 <롤라 몽떼>, 자크 타티의 <플레이 타임>, 베리만의 <페르소나>마저 뒤로

따돌리고 뛰어넘은 것이다. 이 선정은 영화 미학에 관한 고전주의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구회영(이라고

알려진 김홍준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되자 첫 번째 오마주를 호금전에 바치기로 작정하면서,

결코 자신의 선택을 철회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나도 그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할 생각이다.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호금전이 70년대 아시아영화에서 해낸 역할은 마치 50년대에 오즈가, 60년대에 샤트야지트 레이가, 또는 80년대에 허우샤오시엔이

그리고 90년대에 왕가위가 아시아의 영화를 새롭게 만들어낸 것과 같은, 그 스스로의 지각과 정서의 구도를 그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고 조금도

구태의연하지 않게 창조해낸 것이었다. 그들이 새로운 것은 상투적인 장르 안에서 이제까지의 체험을 넘어서는 새로운 조화와 영화적 개연성을 아슬아슬하게

곡예처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오즈가 홈드라마 안에서 자신의 등장인물들을 추상적 평면성과 고정숏의 부자유 안으로 밀어넣고 그안에서 삶의 사물들에게

정서를 환기시키면서 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만들어준 것처럼, 호금전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무협활극의 상상적 공간을 세상의

풍경 안에 인간이 조화롭게 함께 존재하기 위하여 보존해야 하는 여백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호금전은 무협활극영화의 장르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세잔이 반복해서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린 것처럼 그안에 머물면서 세상의 질서를 형상만으로 담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호금전은

1931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18살 때 홍콩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미술을 공부하였다. 그는 광둥어가 서툴렀기 때문에 별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미술감독으로 영화와 관계를 맺었다. 그는 젊은 시절 배우로서도 경력을 쌓았으며(홍콩영화는 최근까지도 대부분 후시녹음이다), 그뒤 이한상

감독의 조감독이 되어 시나리오를 공동작업했다. 그러나 그가 현장에 잘 적응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쇼브라더스영화사에서 제안한 배우로서의 장기계약을

거절하고 수년 동안 시나리오를 쓰면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처음 두편의 영화 <대지아녀>(1963)와 <옥당춘>(1964)은

성공하지 못했다(<옥당춘>은 공동연출로 그의 작품목록에서 종종 빠지기도 한다). 호금전은 느린 속도로 자기 영화를 찾아낸 시네아스트이다. 매우

낙심한 호금전에게 무협영화를 제안한 것은 쇼브라더스영화사였다. 50년대 후반부터 무협영화는 빠른 속도로 아시아 화교문화권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스튜디오들은 무협액션장면에 어울리게 바뀌고 있었다. 호금전에 겨눌 만한 무협활극의 대가 장철(張徹)도 이 시기에 데뷔하였다. 홍콩 무협영화의

전통은 일본 B급 사무라이영화들에서 온 전통이다. 홍콩 스튜디오는 액션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일본에서 사무라이영화에서 살진(殺陣)이라고 불리는

일 대 다수의 동작을 지도하는 전문가들을 끌어들였으며(구로사와 아키라는 다른 사무라이영화들과 다르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의 두편의 활극영화 <요진보>와

<츠바끼 산주로>에서 살진 스탭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만에서 활동중인 무협소설 작가들이 시나리오에 참여하였다.

스튜디오는 피아노줄로 연결된 배우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기 위한 공간이 되었으며, 조연들의 다수는 무술을 알거나 경극 배우들로 바뀌고 있었다.

호금전은 자신의 세 번째 영화를 준비하면서 무협영화들을 보다가 자신이 무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호금전과 달리 장철은 남방무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이 실제의 액션장면을 잘 만드는 대신 무술장면을 다른 전통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호금전 자신의

말에 따르면 “스튜디오에서 무협영화들은 이상하게 모두들 액션장면의 리얼리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하늘을 날고, 칼과 칼이 부딪치면서 화살을

던지는 장면들은 사실상 대부분 상상에 의존한 것인데도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만들려고 했었다. 그것은 금방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더 시각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액션과 풍경의 관계로 나의 관심을 돌렸다.”

그것은 상투적인 거절의 좌표가 아니다. 이 말은 역사 안에서 다시 읽혀야 한다. 풍경없는 도시 홍콩에서 그가 풍경을 자신의

무대로 삼는다는 것은 영화 속의 새로운 천지창조-프로젝트를 세우고, 그안에서 집-세상을 만들어내겠다는 창조적 의지이다. 그 프로젝트를 호금전은

미묘한 시기에 추진했다. 1964년 중국의 문화혁명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해온 중국인들은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의식을

처음 갖기 시작했다(왕가위의 <화양연화>). 사회주의의 물결과 함께 홍콩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해 중국에 귀속하자는 대학생 좌파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그리고 베트남전이 그 이듬해 5월 하노이폭격과 함께 격화되었다(오우삼의 <첩혈가두>). 중국 공산당을 피해서 내려온 이들은

국민당의 장제스가 이끄는 독재정치의 대만으로 이주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 홍콩인들은 사면초가에 이르렀다.

그안에서 무협영화는 대부분 중국을 무대로 한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시대는 명나라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중국은 싫지만

그러나 고향 중국에 대한 ‘좋은 옛것’에 대한 간절한 향수가 담겨 있는 것이다. 가고 싶지만 가고 싶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중국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무협활극의 무대가 된 명나라시대이다. 그러나 그 시대는 동시에 청나라의 위협에 놓인 불안의 시공간으로서의 크로노토프이다. 그 시대를

살아간 선남선녀들의 영웅담을 보는 것은 잃어버린 대상의 가장자리에서 구멍난 상처를 채우는 환상일 것이다. 다시 가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동안 무협영화가 비극적인 정서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실현될 수 없는 역사의 잉여로서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호금전은 자신의 영화 속 풍경의

장소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 불가능의 프로젝트를 스스로 세운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그는 자기 영화의 복구불가능 자체를 스스로의

화두로 삼아서 끌어안은 것이다.

1965년

<대취협>을 만들고 나서 그 이듬해 즉시 <용문객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장철의 <검객 외팔이>와 함께 홍콩 무협영화의 이정표가

되었다. 호금전은 정말 새로운 무협활극 액션을 창조해냈다. 그는 무술 동작의 리얼리티 대신 베이징 오페라와 모던댄스의 율동을 영화와 조화시켜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리듬의 페이스”라는 시학을 만들어냈다. 호금전은 살진 스탭을 동원하는 대신 베이징 오페라의 대가인 한영걸을 무협활극장면의

고문으로 함께 작업했다(그는 브루스 리의 데뷔작 <당산대형>에서 마지막에 대결을 벌이는 악당 보스로 나온다). 호금전은 스튜디오 안에서 무대공간을

설정하고 그안에 다층적인 인물들을 하나의 공간에 집어넣었다. 그에게서 사막 한복판에 서 있는 객잔은 그 자체로 홍콩에 대한 알레고리이자 동시에

중국 실내극 양식을 보여주는 소우주이기도 했다. 그안에서 충정과 배신, 신의와 음모, 적과 친구를 알 수 없는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보여지면서

동시에 그안에서 아무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마치 카프카의 부조리한 공간처럼 보여지는 이 안에서 그들이 나올 수 있는 장소는 황량한 모래 사막뿐이다.

호금전은 시종일관 객잔 안에서 인물들의 관계를 놓고 자신의 공간을 사유한다. 그것은 영화의 위대한 전통 안에 들어가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이를테면

무르나우, 또는 오슨 웰스). 그는 여기서 서방세계의 시선의 규칙을 버리고 과감하게 객잔이 만들어내는 건축적인 시선의 공간에 따른 비율과 배분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를 옮겨간다. 객잔의 문과 기둥과 계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식탁은 건너보기, 올려다보기 그리고 내려다보기 사이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설정되고 긴장이 만들어지는 프레임의 배치와 트래킹의 영역이 빚는 건축·영화적 모델을 빚어낸다. 객잔은 사각형 세트이지만 호금전은 그것을

입방체의 공간으로 다시 사유한다.

그 공간은 우국지사와 간신들, 주인과 손님, 도망치는 자와 쫓는 자, 협객과 도리를 저버린 검객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공존하는 장소이다. 호금전은

이것을 거의 자유자재로 접었다 펼친다. 그의 영화 미학을 병풍화의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용문객잔>의 진수는

그들이 객잔 바깥으로 나간 마지막 대결의 순간이다. 호금전은 그 대결을 모든 이들의 기대와 정반대의 방법으로 연출한다. 그들이 황량한 사막에서

벌이는 대결은 대부분 멀리서 보잘 것 없이 그려진다. 호금전은 인간들의 욕심에 사로잡힌 그 칼부림이 대지 앞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풍경은 결국 자연이며, 자연 안에서 인간이 조화로이 존재하는 태도는 무엇인가라고 마지막 순간 물어본다. 호금전의 주인공들이

유교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의 풍경이 불교에 기대어 있다면, 마지막 순간에 물어보는 것은 도교적인 것이다. 그의 영화가 유·불·선의 삼위일체에

다가가려는 것은 호금전의 미소이다.

,

호금전은

‘객잔 4부작’이라고 불리는 <대취협>과 <용문객잔> <희노애락 지노>(1970), <영춘각의 풍파>(1973)를 만들었다. 이 영화들은 서로

차이는 있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의 변주이다. 그러나 호금전은 실내 공간에서 그의 카메라를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70년대에 ‘풍경 4부작’이라고

불리는 <협녀>(1971), <충열도>(1975), <공산영우>(1978), <산중전기>(1979)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것은 진정 위대한

걸작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걸작들과 다른 의미에서 만신전의 자리에 오른 목록들이다. 트뤼포의 말을 빌리면 위대한

영화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장 르누아르처럼 영화 전체가 비밀을 담고 있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로베르 브레송처럼 어느 순간

기적의 순간이 담기는 영화가 있다. 호금전은 기적의 순간을 보여준다. 그가 만들어내는 명장면은 정말 숨을 멈추게 만든다. 그 기적의 순간을

위해 영화 전체가 바쳐진 것이다. <협녀>에서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 수직 활강하면서 상대 무사를 쓰러트리는 장면, 거의 삼라만상을 가로질러

피안에서 속세로 건너오는 듯한 소림사 고승의 초상비행이라고 불리는 경공, 또는 <충열도>의 마지막 대결 시퀀스 전체, <공산영우>에서 수십명의

비구니들이 계곡을 날아서 춤을 추듯이 뛰어내리는 장면 48초(정말 이 장면은 모든 호금전 영화 중에서 최고이다. 나는 이 장면만 100번 이상

보았지만 이 기적의 순간의 비밀을 풀지 못한다), 그리고 <산중전기>에서 선비를 찾아 귀신이 된 하녀가 허공을 춤추듯이 나무 사이로 날아오르며

추적하는 장면은 정말로 영화에서 감각이 그 스스로 짧은 지속을 영원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버티게 하면서 그 기적의 순간에 가 닿는 보전-생성의

찬미할 만한 풍경이다(나에게 어린애처럼 말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정말 리안의 <와호장룡>이나 왕가위의 <동사서독> 따위는 상대가 안 된다.

82년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홍콩영화 특집을 책임편집한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장만옥과 함께 <화양연화> 때문에 서울에 왔을 때 정말 허심탄회하게

홍콩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와 의견일치를 본 것은 <공산영우>의 그 장면이 영화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아이, 좋아라!). 호금전은 자신의 영화를 세상 안에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 창조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호금전의 ‘풍경 4부작’의 영화 미학은 시네마스코프 화면과 코닥필름의 질감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코닥필름의 붉은색 질감을 이용해

화면에서 빛의 느낌과 옷의 결을 함께 살려낸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바깥으로 나갔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언제나 영원하게 그렇게 머물러

있는 산수들이 인간세상의 희로애락들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그들의 부질없는 욕망의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일순간의 광경을 찰라적으로 담는 것이었다.

호금전은 그것을 “공기를 찍는 것”이라고 불렀다. 그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공기 속에 그들의 옷깃을 날리면서, 공기 속을 유영하여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공기를 가로질러 무중력 상태로 수직으로 뛰어내린다. 그 공기를 담는 것은 마치 중국화에서 화면을 비우고, 그안에 자리한 공백들이

보이는 것들과 함께 존재하면서 이미 충분한 여백이 되는 것처럼, 자기 앞에 주어진 풍경에 태양의 조명을 끌어들이고, 그안에 다시 스모그를 만들어서

화면의 여기저기를 듬성듬성 비워내는 작업이 되었다. 그것은 실제로는 현장에서 매우 번거로운 과정을 요구한다. 사물과 등장인물이 있고, 그 사이에

스모그를 뿌리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시 그뒤에 조명을 설치한 다음, 끊임없이 이동하는 태양이라는 조명에 따라 계속해서 조도가 바뀌기 때문에

조명과 반사광을 다시 설치해야 한다(호금전의 제작부였던 허안화 감독은 호금전이 하루에 한 장면을 찍는 날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대부분

한달 만에 모든 촬영과 편집을 끝내는 홍콩영화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여기에 여러 장소에서 촬영한 장면들은 장소가 요구하는 색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호금전에게 매우 가혹한 과정이 되었다. 그러나 호금전은 기꺼이 그 모든 것을 끌어안았다.

그의 영화 중에서 <협녀>는 대만과 홍콩에서 촬영했으며, <영춘각의 풍파>는 홍콩과 한국에서 찍었다. 그리고 <공산영우>와

<산중전기>는 한국에서 모두 촬영하였다(호금전에 의하면 불국사와 해인사 그리고 광주와 설악산에 찍었다. 제주도도 답사했지만 일출과 일몰 사이의

색온도 차이가 너무 커서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다른 장소에서 연출하는 것은 호금전이 풍경에서 세상을

보는 방법이다. 매우 아름답게 촬영된 <공산영우>와 달리 <산중전기>는 암울하고 허무한 기분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70년대 내내 한국영화의

장면들을 보면서 왜 이렇게 한결같이 화면들이 빈곤하고 앙상한 결핍으로 가득 차 있는지 궁금하곤 했었다.(그 예외라면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뿐이다). 그런데 <산중전기>에서 그 대답을 찾았다. <산중전기>는 깨달음을 줄 법경을 찾으러가는 선비가 우연히 여행길에 들른 집에서 반강제로

그 집의 딸과 결혼식을 올리게 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아내는 귀신으로 그 집의 가족들을 모두 인질로 잡고 선비로 하여금

그 집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상영시간 3시간에 이르는 이 장대한 괴담은(우리나라에는 처음에 피카디리극장에서 한국어로 더빙하여 1시간40분으로

편집판이 개봉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시작해서 가족 전체가 귀신에 볼모로 잡힌 채 선비에게 거짓말을 하는 대목에 이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괴담을 호금전은 70년대 한국의 산수가 보여주는 그 황량한 풍경과 (일부러 초겨울에 촬영한 것이 분명한) 사철나무들만이 기괴하게 몸을 틀면서

자라난 침엽수들의 그로데스크한 바로크적 인상들, 그리고 여기에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푸른색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게 그저 내버려둔다. 그것은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산 속 깊은 곳의 괴담에 더없이 어울려 보인다.

그는 70년대 한국의 산수풍경 속에 들어가 근대화에 실패하고, 새마을운동이 참혹하게 부순 자연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끌어들이면서 자기 영화 안에서

이제까지 다루었던 자연 속의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귀신들에게 홀려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모습을 담는 것으로까지 밀고나아간다. <산중전기>는

아시아가 서구 근대화로 스스로의 모습을 잃고 홀려가는 형상을 그 끔찍하게 뒤틀린 산수의 풍경 안에서 재현해내는 비극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결국 뒤틀린 역사는 풍경 안에서 어떻게 자기를 드러내는가를 보여주는 점에서 참혹하면서도 비통한 아름다움에 가득 차 있다. 호금전은 이 네편의

영화에서 세상의 자연스러운 존재가 사실은 인간으로 인해 부서지는 형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는 그것은 소멸의 존재들인 인간이 자연의 삼라만상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것은 부서져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을 탄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 이후 호금전은 더이상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매우 쓸쓸한 것이다. 대만으로 돌아가 <종신대사>(1981)와

<천하제일>(1983) 그리고 옴니버스인 <대윤회>(1983)를 만들었지만 그의 지지자들을 제외한다면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극이 은둔중인 그를 끌어내 <소오강호>를 맡겼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두달간 촬영 뒤에 포기하였다. 그리고 1992년

유작이 된 <서피지음양법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장 르누아르나 프리츠 랑의 마지막 영화들처럼 타협하지 않으면서 자기

영화를 만들고자 했으나 이미 자기의 시대를 놓친 채 가까스로 서명만을 남겨놓은 작품들이 되었다. 호금전은 자기의 시대를 갖지 못했던 예술가이다.

1997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호금전과 함께 (적어도 나에게) 홍콩 무협영화는 끝났다. 그 이후의 모든 무협영화는 결국 후일담인 셈이다.

▶ 무협영화의

신, 호금전이 온다

▶ 호금전

감독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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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영화제 초청작 다섯 편

▶ 호금전

마지막 인터뷰

▶ 호금전을

추억하다

▶ 회고전을

열기까지 준비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