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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우리가 놓친 영화 [1] - 미국

2004년 한국이 놓친 영화 8편

애타게 걸작을 찾아서

연말연시 해외 영화전문지들을 뒤적이다보면, 그해 최고 영화들의 순위를 매기거나 긴 페이지를 할애한 결산 특집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그러나 우리에겐 낯선 영화 제목들을 발견하게 된다. 몇해 전, 영어권 국가에 ‘패스트 러너’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던 가 그랬었다. 현지평자들이 2002년 최고 혹은 최선의 영화로 앞다퉈 소개한 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은 2년이 지난 2004년 이 영화가 국내에 소개될 때까지 꾹꾹 눌러두어야 했더랬다. 그래서 올해는 조금 적극적으로 나서보기로 했다. 2004년 한해 동안 해외 각지에서 소개된 영화 중에서, ‘걸작’으로 추어올리거나 ‘발견’으로 꼽을 만한 성과가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의 해외 통신원들이 ‘강추’해온 영화 8편에는 하나로 아우를 만한 특별한 기준은 없다. 90대에 접어든 일본의 거장 신도 가네토의 부터 영국의 신예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까지, 장르영화의 귀재 두기봉의 화려한 액션 부터 단돈 200달러로 찍은 조너선 코예트의 다큐멘터리 까지, 감독의 지명도와 작품의 모양새는 제각각이다. 분명한 건 현지의 필자들이 이 영화들을 올해의 ‘대표’영화로 꼽으며, 한국 관객에게도 소개하고 싶다는 진심과 열정을 담아 글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중에는 처럼 국내 영화제에 상영된 작품들도 있지만,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고 공들여 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지면을 통해 다시 다루기로 했다. 따라서 이번 기획은 2004년의 결산인 동시에 반성인 셈이다.

평단과 관객, 모두 만족시킨 저예산독립영화

알렉산더 페인

2004년 가 유난히 눈에 띈 것은 주인공이 잘생기거나, 세계적 명감독이 연출을 했다거나, 기상천외한 소재를 다뤄서가 아니다. 너무도 사실적이고, 솔직하고, 그래서 공감이 가는 캐릭터들 때문이다. 등 주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춘 영화를 선보였던 알렉산더 페인이 자신의 장기를 잘 살려 보여준 작품.

로드무비이자 버디무비인 이 작품의 주인공은 40대의 중학교 영어교사 마일즈(폴 지아마티)다. 영화는 그가 결혼을 일주일 앞둔 대학동창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과 함께 북부 캘리포니아 포도 농장으로 와인 시음을 떠나는 여정을 담았다. 두 남자는 대학 때부터 절친한 사이지만 성격이나 외모가 판이하다. 작은 키에 머리숱도 점점 줄어들며, 늘 인상을 쓰는 마일즈는 이미 결혼에 실패했고 쓰고 있는 소설마저 출판되지 못할 위기에 있다. 슬픔을 잊으려는 듯 와인에 집중하는 그는 일종의 알코올 중독자. 반면 잭은 별로 잘 나가지 못하는 배우지만 낙천적이며, 아직까지는 미남이라고 우길 수 있는(?) 외모를 가졌다. 그러나 잭 역시 중독된 것이 있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여자’다. 한 평론가의 지적처럼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오랫동안 친구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함께 모이면 서로의 결점을 보안해 어느 정도 정상적인 한 사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될 정도다. 이들은 여행 중 원예학을 공부하는 웨이트레스 마야(버지니아 매디슨)와 와인 시음장 직원 스테파니(샌드라 오)를 만난다. 이 두명의 아름다운 여성으로 인해 마일즈와 잭은 어느새 중년이 돼버린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고, 불만과 욕망을 직시하게 된다.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전경과 함께 펼쳐지는 이 작품은 유명배우가 나오지는 않지만, 대체할 만한 다른 배우들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배우들이 모여 있다. 마일즈 역의 폴 지아마티는 2003년 에 출연해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아카데미에는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등 평가절하된 연기파 배우. 그가 연기하는 마일즈는 모든 면에서 ‘루저’(loser)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다. 특히 마야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도에 대해 설명(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하는 장면과 그뒤를 잇는 마야의 답변(마일즈의 있는 그대로를 좋아한다는)은 첫사랑의 고백처럼 마음을 설레게 한다. 방탕한 성생활과 도덕관념이 결여된 듯한 ‘막가파’ 잭을 연기한 토머스 헤이든 처치는 90년대 미국 시트콤 로 알려진 코믹배우. 마일즈의 지나친 소심함에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역할을 코믹하지만,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전처를 잊지 못한 마일즈에게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이해심 많은 여인 마야 역에는 영화 팬들에게 으로 알려진 버지니아 매디슨이 출연했고, 잭에 버금가는 섹스 편력을 과시하는 스테파니 역에는 이미 로저 에버트를 비롯한 대다수의 평론가들로부터 연기력을 인정받은 한국계 캐나다 배우 샌드라 오가 열연한다. 그녀는 페인 감독의 실제 부인이기도 하다.

골든글로브상 7개 부문 후보에 오른 는 각종 비평가협회 상을 휩쓸고 있으며, 미디어와 평론가들의 톱10 리스트에도 빠지지 않아 강력한 ‘오스카 버즈’를 얻고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감독은 물론 4명의 메인 캐릭터를 맡은 배우 중 샌드라 오만이 골든글로브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 평론 전문 웹사이트 라튼토마토닷컴에서 96% 신선도를 받아, 일부에서는 대부분의 평론가들처럼 생긴 배우(지아마티)가 주인공을 맡아서 호평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농담도 들린다. 하지만 2004년 10월20일에 한정 개봉된 저예산 독립영화로, 그다지 홍보가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2월26일 현재 1850만달러의 수익을 올려 단순히 평론가들만 좋아하는 영화가 아니란 것을 입증하고 있다.

세계를 놀래킨 200달러짜리 영화

조너선 코엣의

가정해보자. 아름답고 건강했던 당신의 어머니가 지붕에서 떨어진 뒤 정신이 이상해졌다면, 그래서 위탁시설을 전전하며 자라나야 했다면, 어머니가 강간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거지 같은 집구석에 살면서 당신 역시 정신병원을 들락날락거리게 된다면,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가 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할머니는 죽고 할아버지는 알츠하이머로 망가지고 어머니는 리튬 과다로 위독한 상태에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삶이라면. 그것이 당신이 품고 가야 할 가족이라면. 이 버거운 삶을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삶의 무게에 눌려 세상을 향해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묻겠지.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넌 왜 늘 그렇게 고통스러운 얼굴로 살아가는 거지?” 서른해를 그렇게 살아온 남자가. 이제 영화로 대답한다. 여기, 내 엿 같은 삶이 있어. 보라고. 들으라고. 하지만 나는 이 지옥을 사랑해.

2004년 미국 영화계는 이라는 200달러짜리 영화 앞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너선 코엣이라는 서른한살의 감독이 만든 이 자전적 다큐멘터리는 2004년 초 선댄스영화제를 거쳐 칸영화제에 소개되었고, LA영화제 최고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으며, 뉴욕영화제에 상영된 이후, 10월 초 뉴욕에서 개봉했다. 극장은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한동안 에 대한 이야기가 뜨겁게 오갔다. 의 A. O. 스콧은 “올해 가장 이상하고, 가장 흥미로운 영화. 이제 의 영향을 받은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영화가 속속들이 출현할 것”이라며 이 영화의 영향력을 점쳤고,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비범하고, 직설적이고, 절박하고, 분노에 찬,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이고 희망적인 영화”라고 평했다. 사실 이 선택한 ‘비디오다이어리’ 방식이나, 편집 스타일은 그리 새롭지 않다. 한물간 유행이요, 지루한 MTV스타일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회상이나 재연이 아닌, 날것 그대로 포획된 끔찍한 삶의 장면들은 강한 힘을 가지고, 그 삶에서 나온 편집스타일은 스타일에 그치지 않는다. 여전히 자아분열적 증세에 시달리는 그에게 한장의 사진이 멀티숏으로 분할되고 다시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화면은, 팝아트적인 표현방식이 아니라 바로 코엣의 머리 속에 펼쳐진 투명한 지옥도다. 또한 가족의 역사를 커다란 자막을 통해 대상화해 소개하는 방식은 그가 이 고통스러운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11살 때부터 이웃의 카메라를 빌려 찍은 160시간의 분량의 테이프와 200장이 넘는 스틸사진들, 전화기의 음성메시지, 같은 컬트영화 클립들을 컴퓨터로 편집한 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노력을 제한다면, 단돈 218달러 32센트라는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맨해튼 5애비뉴 보석가게의 도어맨으로 일하던 코엣은 어느 날 존 카메론 미첼()의 차기작인 의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러프하게 편집된 을 보게 된 미첼은 이 비상한 영화를 구스 반 산트에게 소개했다. 반 산트는 “글을 쓸 돈으로 영화를 찍는 시대. 나는 늘 이런 영화를 기다려왔고 여기 그가 나타났다”며 의 출현을 반겼다. 결국 이 두 감독이 제작프로듀서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브루클린의 어두운 방에서 썩어문드러졌을 이 불행한 남자의 일기장이 전세계 관객에게 펼쳐지게 된 것이다.

조너선 코엣은 “영화감독을 꿈꾸지 않았던 때를 기억할 수 없는” 태생형 필름메이커다. 그러나 그에게서 ‘영화찍기’는 천재성의 이른 발견이나, 단순히 취미생활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영화는 자신을 지켜내는 유일한 무기였다. 따뜻한 총이요, 부작용 없는 약물이었다. 영화의 제목 ‘Tarnation’(eternal+damnation)처럼 ‘영원히 저주받은’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한때 그는 밥먹듯이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이 지옥을 껴안을지를 발견했다. 그것이 영화였다. 그렇게 그는 영화와 함께 살아남았다. 곪아터져서 진물이 나고 피가 흐르고 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88분간의 기록, 은 그 처절한 생존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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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권은주·디자인 노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