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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쓰러운 자가당착, <신석기 블루스>

외모에 대한 편견을 다지는 안티-로맨스 <신석기 블루스>

<신석기 블루스>는 안쓰러운 영화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뒤집어서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신체를 바꿔치기하며 외모지상주의를 극복해보려 하였지만, 정작 추론되는 것은 ‘외모의 절대성’이며, 신체를 둘러싼 문화사회학적 맥락을 묘파해보려 하였지만, 사회적 관계를 탈각한 ‘운명으로서의 신체’, 즉 ‘생물학적 결정론’에 빠지고 만다. 이 자가당착을 로맨스로 메우려 하지만, 그 사랑 역시 자신이 초월하고자 하는 사회적 위계에 온전히 발이 묶인다.

영화는 다만 두 사람의 신석기를 통해 의 ‘3.6.9-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변호사 편’을 (‘장동민’ 역을 ‘이성재’가 맡아서) 극장판으로 상연하는 것인데, 여기에 ‘성공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도 마침 잘난 남자에게 채인 여자를 잘 구슬려 결혼하게 되었다는 껄렁한 연애담을 첨부한 것이다. 이 영화의 기이한 자기모순을 신체담론과 로맨스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몸은 운명인가 산물인가?

‘신체교환’ 영화들은 꽤 많다. ‘빙의’의 형식을 취하는 같은 영화들도 있고, ‘분장’의 형식을 취하는 같은 영화들도 있다. 이들 영화의 극적인 설정은 공고한 자아의 정체성을 이루는 신체를 영혼과 분리시킴으로써 ‘몸’과 ‘몸의 구성 요소’를 상대화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잘 만든 ‘신체교환’ 영화는 ‘몸’에 대한 심오한 담론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성, 나이, 인종, 계급이 다른 몸으로 치환됨으로써 신체를 둘러싼 사회적 ‘차이’와 ‘차별’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며, 절대적이라 여겨졌던 신체적 구성 요소의 경계가 교란되면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색다른 발언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도 ‘빙의’의 형식을 취한 ‘신체교환’ 영화이다. 그런데 둘의 이름/성별/생년월일/직업을 동일하게 설정하였으니, 여기서 교환되는 것은 성/나이/인종/계급이 아니라 오로지 ‘외모’라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차이는 비단 ‘외모’만의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의 직업은 같지만 경제상태는 천양지차이며, 그들의 ‘아비투스’와 ‘이데올로기’ 또한 완전히 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외모만큼이나 계급이 다른데, 영화는 계급 차이의 ‘현상묘사’만 할 뿐 ‘원인규명’은 하지 않는다. 다만 ‘잘난’ 신석기가 “고아나 다름없다”고 말해진다. 그렇다면 그의 상류사회적 ‘아비투스’는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별다른 설명이 없을 뿐더러 극단적인 설정을 취한 의도로 보건대, 그의 자신감, 세련됨, 깔끔함, 자본가의 편에 선 계급의식 등은 모두 그의 ‘잘난’ 신체에서 기인한 것이며, 그의 ‘잘난’ 신체와 그로부터 파생된 행동거지와 사고방식 등을 무기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승장구하며 자본 계급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신체는 운명이며 계급을 결정한다’는 것.

신체를 둘러싼 사회적 편견을 문제삼고자 하는 이 영화가 취한 ‘신체->계급’의 일방적 도식은 이 영화가 ‘몸이 계급의 상징물’이라는 사회학적 성찰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즉 몸이 사회생활을 함으로써 형성되는 미완의 것이자, 사회적 위치/아비투스/취향 등의 상호 연관성을 통해 발달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영화 속의 신체는 사회관계의 산물이 아니다. 그저 ‘운명’의 산물이며, 그의 성격과 사회관계에 오히려 제1원인으로 작용한다. 일종의 ‘생물학적 결정론’인 셈이다.

이 영화가 몸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양가적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정신의 능력이 아니라 몸의 능력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을 만큼 유물론적이면서, 식물인간 상태의 몸으로라도 다시 들어가기만 하면 깨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할 만큼 기계론적이다. 말하자면 (신체에 대한) 기계론적 유물론이다. 한편 그나마 낫다고 여기는 ‘못난’ 신석기의 영혼에 대한 태도도 양가적이다. 영화는 그 영혼에 대해 호의적인 듯하면서도 그 영혼의 행방을 불문에 부치며, 두 사람 모두와 친분이 있으며 유일하게 신체교환의 비밀을 아는 선배조차도 ‘못난’ 신석기 영혼의 실종을 애석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난’ 신석기의 몸 탈환에 적극 나선다. 말하자면 (그의 영혼에 대한) 철저한 무시이다. 신체와 영혼에 대한 어설픈 이해 속에 ‘신체교환’의 취지는 거꾸로 달리고, ‘잘난’ 신석기를 사랑하던 여자와 ‘못난’ 신석기 사이의 로맨스만 남는다. 그 역시 부정하고 싶어하던 ‘잘남/못남’의 장벽에 스스로 목을 매고 만다.

사랑의 어긋난 작대기는 사회적 위계에 의해 정해진다?

그녀가 분명히 밝혔듯 그녀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잘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엄마한테 데려오겠다” 장담하며,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데이트를 유도했다. 동의하에 행한 카섹스 직후 그가 담담해하자 그녀는 미친 듯이 오버하며 저주를 퍼붓는다. 그녀는 뭘 바란 걸까? 설/마/ 한번 섹스하면 결혼해야 한다고 우기는 건가? 상식적으로 한번의 섹스가 자동으로 결혼으로 이어진다면 의 오빠들의 공로(?)는 뭐란 말인가? 그녀가 아둔하여 정말 그리 믿었다면, 그가 그녀의 뜻대로 응하지 않을 때, 마치 배신당했다는 듯이 엉엉 울며 자신을 속이지 말고, 다음 상대를 물색하거나 한번의 섹스를 빌미로 결혼으로 밀어붙일 계략을 짜는 것이 합당하다. 그녀는 당일에 이미 그의 마음을 알았다. 그날 이후 그녀의 ‘잘난’ 신석기에 대한 미련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그런데도 법정에서 “하룻밤 놀이상대”였다는 것을 전해 듣자, 처음 알았다는 듯이 경악한다. 영화는 그런 그녀의 ‘쌩쑈’에 모른 척 속아주며 그녀의 욕망을 ‘순수한 사랑’이라며 눈감아준다.

‘잘난’ 신석기에게 채인 그녀는 ‘못난’ 신석기에게 이유도 없이 끌린다. 영화에서 “그 신석기가 깨어나면…”이 묻고 답해지지만, ‘잘난’ 신석기에 대한 선택권은 애초 그녀에게 없었으므로, 그녀의 대답은 의미가 없으며, 잘난 남자 좋아하던 그녀의 욕망이 폐기되었다고 볼 수도 없다(이를 입증하려면 다른 잘난 남자의 구애를 그녀가 뿌리쳤어야 한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잘난 남자들에게 계속 추파를 던지거나 ‘못난’ 신석기에게 안주하는 것뿐인데, ‘잘난’ 신석기에게 채인 그녀의 자존심이 ‘못난’ 신석기에게 위로받아 그 자리에 눌러앉은 것이다. 한편 신석기는 ‘잘났던’ 시절에는 전혀 안중에 없던 그녀가 ‘못난’ 상태가 되자 이유도 없이 끌린다. 그것도 그녀가 좋아하는 그 잘난 요소가 현재 자신의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 ‘잘났을 땐’ 사이코 같던 그녀도, ‘못나지고 보니’ 감지덕지라는 것인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 3자의 관계는 ‘잘난’ 신석기> 그녀> ‘못난’ 신석기의 위계를 가지며, 이 위계에 의해 그들의 불가사의한 감정의 변화가 모두 이해된다. 둘째,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은 잘나고 못난 것을 초월하며, 못난 사람도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어긋난 작대기는 철저하게 사회적 위계에 의해 정해진다’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는 ‘신체교환’을 통해 신체적 구성 요소를 해체하기보다는 신체를 절대적이고 유일한 실체로 만들어 신체와 외모에 대한 편견을 공고히 한다. 한편 이 영화의 사랑은 권력과 육체자본(physical capital)으로 구축된 사회적 위계의 감정적 반영일 뿐이다. 달콤한 로맨틱코미디인 줄 알았더니, 씁쓸한 ‘안티-로맨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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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