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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렁에 빠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사진 오계옥이영진 2005-01-12

김홍준 집행위원장 해촉 뒤 혼란… 영화계 집단 보이콧·법적 대응 움직임

조타수를 바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기우뚱하고 있다. 심지어 항로를 잃고 표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해 12월30일, 김홍준 집행위원장이 갑자기 해촉되면서부터다. 정일성, 이춘연 등 5명이나 되는 조직위원들이 해촉 결정 전후로 사퇴했고, 그동안 김 전 집행위원장과 영화제를 꾸려왔던 영화제 스탭들도 대부분 재계약을 포기했다. 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홍건표)는 정홍택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을 새 집행위원장으로 앉혔지만 영화계 안팎에선 “올해 영화제가 제대로 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부정적인 반응투성이다. 개막 6개월 전이면 상영작 수급 등 본격적으로 행사 준비에 나설 때지만, 영화제는 기력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해촉 그 이후 표류하는 부천영화제

영화계의 반발은 불에 기름을 부은 듯하다. 12월29일, 박찬욱, 김지운,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이영애 등 영화계 주요 감독 및 배우 30여명은 “김 집행위원장을 해촉할 경우 영화제 출품 및 참석을 거부하겠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1월6일 영화제 출품을 거부하기로 결정한 것을 시작으로 영화인회의,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여성영화인모임 등 주요 영화단체들도 해촉안이 통과되자 조직적 차원에서 영화제 보이콧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 여론은 싸늘하다. 부천시민연합을 비롯해 5개 지역 시민단체들이 “관(官)이 영화제의 자율성을 해쳐선 안 된다”고 강하게 비판한 데 이어 해촉 사실이 알려지자 영화제 정상화를 위한 모임(cafe.naver.com/antipifan) 등에는 해촉 결정에 반대하는 시민들 의견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그러나 영화제 조직위원회는 이같은 반응에 개의치 않겠다는 입장이다. 한 조직위원은 올해 영화제 계획안이 “80% 정도는 마련됐다”면서 “새 집행위원장이 업무보고를 받은 다음에 공개모집이 이뤄질 것이고 두달 정도면 스탭진이 확보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와 영화제 모양새가 크게 달라질 것은 없으며 다만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늘어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화인들의 보이콧에 대해서도 “어차피 영화제에 안 올 사람은 안 오고 올 사람은 오는 것 아닌가. 언론이 지나치게 현 상황을 부풀리고 있다”면서 크게 신경쓰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앞서 총회에서 부천시장인 홍건표 조직위원장도 4회 영화제 당시 자신이 시쪽에서 영화제를 담당한 실무자였음을 밝히면서 “그때 김홍준 집행위원장 없이도 영화제를 잘 치르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진짜 해촉 사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12월22일 열린 이사회에서 조직위원들이 밝힌 해촉 사유는 “김 집행위원장이 영상원장을 겸임하게 돼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돋움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 그러나 홍건표 조직위원장은 일주일 뒤인 12월29일 영화인 대표들과의 면담에선 “영상원장 겸임은 표면적인 이유”라고 털어놨다. 그리고 지난해 영화제 개막식에서 사회를 맡았던 김 전 집행위원장이 자신의 이름을 빠뜨렸고, 폐막식 당시 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을 누차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주장은 총회에서도 반복됐고, 급기야 부천시 경제문화국장인 류재명 조직위원은 “공무원 같았으면 곧바로 인사조치가 됐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총회 직후 언론이 일제히 ‘괘씸죄’가 해촉 사유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에선 시의회, 후원회 등 이른바 지자체 인사들의 불만이 해촉 사태를 불러온 근본적인 이유라고 지적한다. 김 전 집행위원장의 경우, 지난해 계약직이 대부분인 스탭들의 임금 및 처우 개선과 관련해 시쪽에 강하게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고, 이 점이 예산을 쥐고 있는 지자체 인사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남겼을 리 없다는 것이다. “전에도 해촉 건의가 몇 차례 있었다”는 한 조직위원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최근 김 집행위원장의 영상원장 겸임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촉 명분이 만들어졌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신우철 영화인협회 이사장이 총회에서 “영화제 정관상으로도 영상원장 겸임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물었으나 조직위원회는 이에 대해 입을 다물었고, 이번 해촉 결의가 김 집행위원장을 나름대로 배려한 결정이라는 주장을 내놨을 뿐이다.

영화인회의 등은 사유가 명확하지 않고 충분한 토론없이 해촉이 이뤄졌다는 판단 아래 법적 대응도 고려 중이다. 조직위원을 사퇴한 이미례 감독도 “이날 총회는 몇몇 조직위원들이 해촉 사유라 할 수 없는 실수를 들어 김 집행위원장을 예의가 없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식으로 경질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총회를 참관한 이들 중엔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미미하다, 여론이 나쁘니 예산 확보가 어렵다, 그래서 집행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한 해촉 찬성자들이 “영화제가 매년 수익을 내고 있고 관객층 또한 점점 넓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는 반박에 밀리고, 정일성 촬영감독 등이 “교체를 하더라도 그전에 토의가 충분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해촉 보류안을 내자 “영화제 일정에 무리가 따른다”며 서둘러 표결 처리를 했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영화제의 자율권 보장하는 쪽으로 정관 개정해야

이번 사태와 관련해 영화제 정관 개정 요구도 일고 있다. 부천의 경우, 지자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조직위원들로만 구성된 이사회에서 영화제의 주요 안건이 처리되어 왔다고 영화제 스탭들은 말한다. 25인의 조직위원들로 구성된 총회는 자주 열릴 수 없어 이사회에서 논의가 대부분 이뤄지고, 총회는 이사회의 결정을 그대로 통과시켜왔다는 게 이들의 설명. 조직위원으로 활동하며 총회에 참석해왔던 영화인들 중 일부가 집행위원장 해촉이라는 이사회의 결정에 반대, 12월30일 총회 참석을 거부한 것은 이를 증명하는 예다. 이에 비해 영화제를 실질적으로 기획하는 집행위원장은 주어진 권한이 거의 없다. 영화인회의 유창서 사무국장은 “집행위원장에게 사무국 스탭들의 임명권은 물론이고 추천권조차 보장해주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지자체와 영화제가 적절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도록 정관을 개정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영화계 안팎에선 이번 기회에 문화행사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해선 지자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전주영화제, 광주영화제 등도 지자체의 무리한 간섭으로 인해 프로그래머가 사퇴하고 집행위원장이 교체되는 등의 파행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공공성이 실종된 강서미디어센터, 예산을 갖고서 활동을 제한한 활력연구소 사태 등도 지자체의 무리한 입김으로 인해 애초 취지가 실종되는 결과로 나타난 사례다. 현재 영화인회의, 한국독립영화협회 등은 이와 관련한 공청회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 영화제를 어떻게든 무리없이 치를 수 있다”는 부천시의 자신감 앞에 “어떤 영화제를 만들 것인가” 하는 영화계 안팎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그동안의 노하우가 단절되는 상황이 가슴 아프다”

김홍준 전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 인터뷰

-해촉이 결정됐을 때 심정이 어땠나.

=스탭들과 같이 축적해왔던 영화제의 매뉴얼과 노하우가 유지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상황이 가장 가슴 아프다. 그건 하루아침에 쌓이는 게 아니다. 지난 4년 동안 집행위원장이 누가 되더라도 스탭들의 전문성이 영화제의 시스템과 인프라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했는데 도중에 무산됐다.

-해촉 이유가 뭐라고 보나.

=소수 마니아를 위한 영화제일 뿐 정작 시민에게는 외면받았고,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방침에 따른 결정이라고 밝힌 기사를 봤다. 실제로 이러한 주장이 있었다면, 좋게 말하면 시각의 차이이고 나쁘게 말하면 영화제의 성과에 대한 자의적인 폄하라고 보인다. 프로그램을 포함한 영화제의 콘텐츠에 대한 부분은 얼마든지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실제로 8회 영화제의 경우, 마니아들은 지나치게 대중적이라고 했고, 일반 관객은 반대 이유로 아쉬움을 표했었다. 이처럼 엇갈린 평가가 나오는 건 한편으론 영화제 관객의 저변이 확대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총회에선 영상원장이 됐다는 사실을 조직위원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까지도 문제가 됐다. 언론에선 해촉 사태를 이른바 괘씸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나에 대한 문제라 객관적인 판단이 어렵고 현재로선 (조직위원회가 밝힌) 공식적인 이유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조목조목 반박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괘씸죄가 공식적인 이유보다 더 중대한 해촉 사유가 될 수 있을까? 그게 해촉의 주된 이유는 아닐 테고, 그런 일도 있었다는 참조사항 정도일 것이다. 혹시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있다면 나도 그게 궁금하다.

-총회에서 몇몇 조직위원들은 김 집행위원장이 대화를 거부했다고 했다. 사유가 부당해서, 해촉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그랬나.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책임있는 분에게서 이 문제에 관해 대화 제의를 받은 적이 없다. 이사회가 열리기 직전 안건을 검토하는 과정에서야 해촉안이 상정됐고 이게 조직위원장의 뜻이라는 걸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 전에 영화제 준비를 위해 여러번 자리가 있었지만 해촉에 관한 어떤 논의도 없었다. 물론 내 거취에 관한 소문을 듣긴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개의치 말고 우리 일 하자고 했다. 사실 소문을 갖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질 수도 없지 않나.

-앞으로 부천영화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부천영화제를 아껴왔던 사람들이 믿어왔던 가치를 훼손한다면 이번 일은 시민으로부터 영화제를 빼앗은 것이다. 김홍준 해촉사건이 아니라 부천영화제 탈취사건이 되는 거다. 지자체와 문화 주체가 함께 치르는 행사들이 왜 반복적으로 부작용을 낳는 것인지, 이를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질문하고 그 방법을 찾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나도 싸우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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