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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라는 모순적 현상, <하울의 움직이는 성>

윈 존스의 원작과 비교해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각색 과정은 종종 두 예술가의 개성이 충돌하는 전쟁터가 된다. 원작을 쓴 사람과 그 원작을 각색하는 사람들이 텔레파시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 한 두 사람의 비전이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경우는 없다. 하긴 그래서 각색이라는 작업이 흥미로운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걸 그대로 충실하게 영상으로 옮겨적는 작품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사실 진짜로 재미있는 각색물에는 모두 그런 충돌과 교합의 흔적이 있다. 를 보라. 아서 C. 클라크의 낙천적인 예언과 스탠리 큐브릭의 차가운 비관주의가 팽팽하게 맞서 있는 게 보인다. 브알로-나르스작의 우울한 프랑스식 분위기가 히치콕의 냉정한 앵글로 색슨적인 감각과 뒤섞이는 은 어떤가.

다이애나 윈 존스의 원작 - 구식 판타지를 재해석한 유쾌한 로맨스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역시 그런 부글거리는 전쟁을 영화 속에 품고 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영국 작가 다이애나 윈 존스의 동명 소설인데, 기본적으로 윈 존스의 소설은 마법사와 마녀들이 나오는 구식 판타지물의 컨셉에 대한 가벼운 풍자이다. 윈 존스는 절세미인 여자주인공과 용감무쌍한 남자주인공 대신 마법에 걸려 주름살이 가득한 아흔살짜리 할머니가 된 소녀와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겁쟁이 마법사를 만들어, 극도로 전형적인 판타지 세계이기는 하지만 현대 웨일스로 가는 비밀 통로가 살짝 숨겨져 있는 인공 세계에 내보냈다. 윈 존스의 작품은 가볍고 발랄하고 유쾌하며 설득력 있는 로맨스다.

윈 존스의 장점은 미야자키의 장점과 일치하지 않는다. 장난스러운 장르 풍자물을 쓰는 윈 존스와는 달리 미야자키는 온화하지만 선이 굵은 모험담의 전문가이다. 미야자키의 유머 감각은 투박하고 직설적이며 공공연하다. 그리고 그의 심리묘사는 종종 설득력 있긴 해도 섬세하다고 말하긴 힘들다. 그의 작품은 내면보다는 외면을 지향한다.

이런 전혀 다른 개성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을까? 못할 건 없다. 사실 나는 을 보기 전에 그 예를 한번 본 것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 밑에서 일했던 애니메이터 가타부치 수나오가 2001년 라는 애니메이션 장편을 낸 적 있는데, 이 작품의 기획은 거의 의 예고편처럼 보일 정도이다. 가타부치 수나오는 미야자키가 그랬던 것처럼(또는 그 뒤에 그럴 것처럼) 현대 영국 여성 소설가(다이애나 콜즈)가 쓴 장르 풍자물(이 경우엔 페미니스트 우화였다)을 미야자키처럼 스팀 펑크 SF의 분위기를 차용한 진지한 드라마로 각색했다. 는 개성이 조금 부족하고 종종 덜컹거리긴 했어도 진지하고 종종 감동적이기까지 한 드라마였다. 그의 제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이 정도까지 했다면 노장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을 각색할 때 취한 태도도 가타부치 수나오의 그것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일단 그는 원작의 가벼운 농담들을 상당 부분 지워버리고 심각하기 그지없는 반전물을 빈틈에 채워넣었다. 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풍자적인 장르 세계를 SF의 세계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단지 가 아틀란티스 문명의 폐허에서 벌어진다면 은 전형적인 스팀 펑크 SF의 배경, 그러니까 빅토리아 시대의 기계문명이 지나치게 발전한 19세기 유럽을 무대로 삼고 있다.

이런 변형은 이치에 맞을까? 다시 말해 다이애나 윈 존스의 소설을 꼭 사와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일단 윈 존스의 소설과 미야자키의 영화가 만나는 부분부터 따져보기로 하자.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제목에도 나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원작에서 하울의 성은 그냥 마법으로 움직이는 집에 불과하다. 만약 윈 존스가 묘사한 그대로 영화에 옮긴다면 별다른 시각적 매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스팀 펑크식 디테일을 첨가한다면? 과거와 미래가 불가능한 지점에서 만나는 근사한 미야자키식 비주얼이 탄생된다. 증기기관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쿵쿵 걸어가는 기계 집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불의 악마 캘시퍼의 존재도 이런 이미지를 통해 훨씬 그럴싸한 존재감을 얻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피도 미야자키에게 어울린다. 언뜻 보면 소피의 설정은 무척 모험적인 것처럼 보인다. 미모와 친근감으로 젊은 관객에게 어필해야 할 여자주인공이 한순간에 아흔살로 늙어버린 할머니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미야자키에게 이건 엄청난 이점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그린 틴에이저들이나 젊은이들은 그렇게까지 개성적이거나 빛나는 인물들이 아니다. 미야자키의 캐릭터들은 나이가 아주 어리거나 반대로 아주 많을 때 더 빛이 난다. 의 파즈와 시타는 호감가는 젊은이들이지만 과연 그들이 조연으로 등장한 공적 할머니만한 개성을 갖추고 있던가? 아흔살로 늙어버린 십대 소녀인 소피는 이 문제점을 해결한다. 여전히 젊은 주인공이면서 나이 든 노인네의 염치없고 내숭 떨지 않는 거칠거칠한 개성과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윈 존스가 만들어낸 스토리 자체도 미야자키가 이전에 탐색했던 경로 위에 놓여 있다. 십대 소녀의 성장기는 그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다루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에 초자연적이가나 불가능한 설정을 덧붙여 색채를 더하는 것도 그의 장기이다. 주인공이 조금 어리긴 했지만 그의 전작인 도 따지고보면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간극의 발생 - 발랄한 원작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해석한 하야오

이 정도면 원작의 존재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면 윈 존스에게서 벗어나 미야자키 고유의 세계를 고집한 다른 부분들은 어떨까?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조금 까다로워지기 시작한다. 윈 존스는 을 한권짜리 농담으로 구성했다. 이 소설에서 배경은 의도적으로 경박하게 구성한 클리셰이고 그것은 분명한 실체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반영이다. 심지어 하울이나 설리먼과 같은 고유명사까지도 그렇다. 윈 존스는 소설 중간에 등장인물들을 현실 세계의 웨일스로 데려가면서 그 환상성의 뿌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밝힌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그렇게 복잡한 문학적 장난은 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처럼 단순하고 진지하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유럽이지만 그는 그 세계의 기술과 마법을 그리면서 장난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우리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마법과 불가능한 물리법칙에 의해 조종되는 세계지만, 미야자키는 그 세계를 우리 세계의 에펠탑만큼이나 진지한 현실로 이해하고 그려낸다.

여기서부터 위태로운 간극이 생겨난다. 윈 존스가 가볍게 놀려대듯 그린 캐릭터들이 이 세계에서는 엄청 진지해져버린 것이다. 미야자키는 윈 존스의 농담들 상당 부분을 남겨놓았지만(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머리색이 바뀐 것 때문에 하울이 징징거리는 장면일 것이다) 그래도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진지하고 감상에 젖어있다. 여기서 가장 손해를 본 캐릭터는 타이틀롤인 하울이다. 윈 존스는 원작에서 이 캐릭터를 잔뜩 놀려대면서도 사랑받을만한 약점과 매력을 가진 인물로 그려냈었다. 하지만 미야자키의 영화에서 하울은 진지한 주제와 함께 일본식 똥폼까지 불려받는다. 그 결과 하울은 뻔하디 뻔한 똥폼 왕자가 되고 그의 매력은 날아가버린다. 윈 존스의 소설에서 하울은 느끼하게 굴어도 귀여운 캐릭터였다. 하지만 미야자키의 영화에 나오는 하울은 심하게 느끼할 뿐이다. 딱한 건 가장 느끼할 때가, 그가 의도적으로 느끼하게 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울은 그가 진지해지고 자신의 사상과 믿음을 위해 투쟁할 때 가장 느끼하다. 아마 그는 미야자키가 만든 남성 캐릭터들 중 가장 재미없는 인물일 것이다. 아니, 재미없는 건 의 하쿠가 더 심하다. 하지만 적어도 하쿠는 원래는 재미있었던 캐릭터를 망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간극은 여기서부터 계속 넓어진다. 이번 문제점은 소피다. 원작에서 소피의 행동은 이해 분명하고 명확한 심리 묘사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미야자키의 소피는 과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가? 우린 소피가 하울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후반부에 이 캐릭터가 하는 행동은 완전 미스터리이다. 왜 소피는 하울의 성을 붕괴시키는가? 왜 소피는 하울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동을 하는가? 물론 여러분은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며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찾아낸 해답이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어떤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건 단순한 작업을 선호하는 예술가가 비교적 복잡한 대상을 자기만의 재해석 없이 과격하게 옮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고이다. 만약 소피의 행동이 단순화만 되었다면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윈 존스의 소설에서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소피를 가져와 자신의 이야기에 끼워맞추었다. 어떻게 영화 속에 집어넣긴 했어도 여전히 빈틈이 보이는 건 당연하다.

원작과 미야자키의 대립 또한 자기모순적인 미야자키 현상

이런 단점들은 용서받을 수 있는 걸까? 그건 여러분이 이 노장의 영화에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은 결코 완벽한 영화도 아니고 철저하게 일관성을 유지하는 영화도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미야자키의 영화들은 언제나 노골적인 자기모순과 함께 했었다. 마법과 스팀 펑크의 과학, 구식 내연기관과 대자연에 동시에 매력을 느끼는 그의 세계 자체가 모순되는 곳이다. 어떻게 보면 윈 존스와 미야자키의 대립은 그 자체가 미야자키적인 현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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