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그때 그 사람들>의 재구성 [3]
이종도 2005-01-25

하늘 같은 선배 후려치기, NG날 수밖에

#6. 실내. 정동공작분실 지하-밤 (박 부장, 답답한지 의자에 앉아 물을 벌컥 들이켠다. 조 소령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조 소령/ 갈아입으세요! (비아냥거리듯 박 부장 셔츠에 묻은 피를 보며) 아, 부장님 누구하고 싸우셨습니까?

을 찍은 수도여고의 교실. 학생들이 데생을 하던 아그리파며 성경책 위에 쌓인 먼지들이 그대로 뒹구는 스산한 풍경이다. 마치 특수작업을 한 듯 세월의 때와 곰팡이와 빗물자국이 얼룩진 교실 벽면 앞에서 사건의 주모자인 박 부장이 사병 군복으로 갈아입고 있다. 커피를 태워 만든 스모그가 자욱하게 방 안을 떠돈다. 어떻게 단 몇 시간 만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수가 있을까. 차갑게 식은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무선이 날아온다. “촬영하셔도 좋습니다.”

새카만 후배 앞에서 파자마 차림으로 벗었다가 사병 군복으로 갈아입는 박 부장의 심경은 처참하고 복잡하다. 충분히 리허설을 한 다음에 한두번 테이크 만에 오케이를 내던 임 감독이 모니터 앞으로 확인하러 오는 일이 잦아진다. 옷을 갈아입으며 대사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전날 벙커로 쓰인 여학교 강당으로 장소를 옮겨 심문 과정을 촬영한다. 어느새 미술팀이 벙커 내부를 다 뜯어놓았다. 며칠 새 세트를 만들었다, 뜯었다를 반복하느라 초죽음 상태다. 분장실에선 박 부장의 심문장면을 지켜볼 단역배우들이 총과 군화, 선글라스를 챙기고 있다. 이 가운데는 각하의 뒤를 이어 새로 집권하게 될 인물도 있다. 이 문제의 인물을 임 감독은 인사동의 단골 술집, 그것도 함께 마시던 술친구에게서 찾아냈다. 머리가 조금 벗겨지고 안경 쓴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또 한명의 일간지 기자가 캐스팅되었다. 대학로의 단골 술집 장의 지영랑 사장을 주 과장 장모로 캐스팅하는 등 배역진 가운데는 임 감독의 지인이 적지 않다.

박 부장을 육체적으로 괴롭혀야 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임 감독은 마음이 착잡해진다. “의자에 앉아 있는 박 부장 가슴을 탁 쳐서 쓰러뜨리고 싶은데, 안 되겠지? 뒤통수 한대만 쳐도 재미있기는 할 텐데.” 배우들 앞에서 마음이 약하다는 임 감독, 무술감독과 대역배우를 데려와 중요한 장면을 찍기는 하지만 백 선생의 뒤통수 한대 치는 것에도 마음을 한번 더 쓰게 된다. 조 소령 역의 조덕제도 마음이 콩알만해지기는 마찬가지. 어찌 하늘 같은 선배의 뒤통수를 칠 수 있으랴.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뒤통수를 친다는 게 너무 부자연스러워 NG가 나고, 임 감독은 “백 선생님 제가 NG 안 불렀습니다” 하고 먼저 선수를 친다. 한편 이 장면을 특수유리를 통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러나는 모 장군 역의 일간지 기자는 단 한마디의 대사를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저 또라이, 저게 혼자 총질하고 지랄한 거 맞지.” 하지만 다리는 카메라 앞에서 얼어붙고 입도 얼어붙어 대사가 목구멍 너머로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때는 간식으로 나온 피자 앞에서 먼저 몸과 마음을 녹여야 한다.

주 과장과 헌병의 추격신으로 촬영 끝!

#7. 실외. 국군서울지구병원 앞-밤 (문제의 두 여자를 매니저에게 인계한 주 과장, 우연히 국군병원으로 들어가는 리무진 행렬을 보고 차를 세운다.) 주 과장/ 야, 화이바! 뭔 일이냐, 응? 안에 들어가시는 분들 누구야? 헌병/ 누구세요? 통행금지도 지났는데.

마지막 촬영일이다. 과천 정부종합청사 근처의 국사편찬위원회 건물 앞. 하천의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적막하기 그지없는 일요일 밤, 크레인에 매달린 대형 조명기 두대가 사위를 밝히고 있다. 순간 등장하는 할리 데이비슨 기종의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지르며 도로를 달리고 사이드카의 인도를 받으며 링컨 컨티넨탈, 롤스로이스, 캐딜락 프리우드 등 리무진들이 병원 안으로 들어선다. 리무진은 모두 금호상사에서 하루 대여비 300만원 이상씩 빌려온 차들로 차량 대여비만 1억원이 넘게 들었다. 사이드카는 할리 데이비슨 동호회의 도움을 받았다.

한석규, 헌병 역의 봉태규 등은 연기를 준비하며 차량 행렬 촬영을 바라본다. 살갗을 파고드는 매서운 추위 앞에 달랑 헌병 제복만으로 버티려니 봉태규의 얼굴이 금세 새파래진다. 헌병장교 역의 감독 김진민은 제작부가 마련해놓은 숯불 앞에서 꽁꽁 언 발을 녹여본다.

먼저 봉고차량에 카메라와 조명기구를 붙이고 리무진 행렬을 찍는 장면. 통행 차량이 많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녹음장비 등이 카메라에 걸리는 등 촬영시간이 의외로 길어진다. 그러나 본장면이 시작되자 한석규는 언제 쉬고 있었냐는 듯 바로 표정을 잡고 르노자동차를 몰아 바리케이드 앞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대본에도 없는 화이바(철모)란 표현을 쓰며 봉태규와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헌병에게 바로 붙잡힐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감추려는 호기로운 표현이지만, 벌써 목소리 안에 패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새벽 1시 넘어 야참으로 수제비 몇 숟가락을 뜬 뒤 신경전 장면을 다시 찍는다.

뒤늦게 주 과장의 정체를 알아차린 헌병장교가 주 과장을 잡아들이려 하자 주 과장이 부리나케 차를 유턴하고, 봉태규가 그뒤를 황급하게 쫓는 장면으로 영화는 46회차 촬영을 마쳤다. 새벽 6시30분. 여느 촬영장보다 비밀스럽고 긴박하게 만들어야 하는 여건 속에서, 얼어붙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묵묵히 일하던 스탭들의 표정이 그제야 환하게 밝아온다. 그들은 처음으로 목청껏 크게 소리를 지르며 임상수 감독과 한석규를 헹가래쳤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편집 박초로미·디자인 노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