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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토요명화>에게 보내는 편지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나서 편지를 쓴다. 요즘 많이 힘들다는 얘기 들었어. 회사에서 당분간 나오지 말라고 했다며. 딸린 식구도 많은 너한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 거 같아. 동료들이 항의시위까지 했다던데 그분들도 충격이 클 거야. 아무쪼록 잘돼야 할 텐데 지금 상황으로 봐선 쉽게 낙관하기도 힘들구나. 아예 책상을 뺀다는 소문도 들리니 말이야. 정말 맘이 많이 상했을 거 같아. 더군다나 그게 <겨울연가>란 녀석 때문이니 오죽 하겠니. 그 친구가 회사에 돈을 많이 벌어주긴 했어도 네 자리를 차고 들어올 만한 실력은 없잖아. 지나가는 사람 열을 잡고 물어봐도 네가 <겨울연가>보다 낫다고 말할 거야.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마. 널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많이 있다구.

하긴 요즘 40대 직장인만 되어도 언제 잘릴지 몰라 조마조마하다잖아. 네가 이렇게 찬밥 신세가 됐다니 가슴이 아프지만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는 생각도 들더구나. 우리 어렸을 때는 영화 보려면 언제나 널 찾았지만 요즘엔 어디 그러니? 만날 영화만 보여주는 채널도 있고 가게에서 비디오로 빌려다보고 거기다 인터넷, 그게 또 난리잖아. 우리처럼 컴맹이었던 세대, 비디오 없이 자랐던 세대나 너에 대한 애틋함을 품고 있는 거 같아. 그렇다고 이 나이에 젊은 애들하고 맞장 떠서 경쟁할 수도 없고. 요즘 같은 불황에 새 직장을 얻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말 나도 뭐라고 조언할 말이 없네. 그냥 네 처지가 남 얘기 같지 않게 들릴 뿐이지.

생각나니? 나 10대 시절에 토요일마다 널 보고 싶어 부모님 말씀도 안 듣고 졸음을 참곤 했잖아. 그래, 그때는 너네 회사에서 만날 “착한 어린이는 9시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이상한 주문을 외웠던 때지.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을 치켜올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 무렵 넌 서부영화를 많이 보여줬던 거 같아. 지금 기억을 돌이켜보면 제목이랑 내용이 온통 뒤죽박죽이라 일일이 이름을 대긴 힘들지만 덕분에 내가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내가 고마워하는 거 알지? 네가 보여준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내 이름은 튀니티> 같은 마카로니 웨스턴을 난 무척 좋아했어. 일요일에 나오는 너의 동료 <명화극장>이 더 깊이있어 보이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너한테 끌렸던 거 같아.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네 모습이 보기 좋아서였을까?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나도 널 외면했던 게 사실이야. 그저 신문이나 잡지에서 아직 여전하네, 확인하고 가끔 만나도 데면데면했던 거 같아. 네가 이런 처지가 되고나니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이해하지? 그렇다고 너와 함께한 추억마저 잊은 건 아니니까 말이야.

그저 힘내, 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기분이 좀 울적하다.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것들이 하나둘 내 곁을 떠나는 걸 보니, 나도 네 신세가 될 날이 머지않았구나, 싶어서 그런 것 같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것이 하나둘 사라져갈 때 갑자기 늙은 느낌이 드는 것이겠지. 하지만 아직은 안녕, 이라고 말할 때가 아니야. 그렇지? 갑자기 너의 밝은 얼굴이 무척 보고 싶어. 아무리 예전만 못해도 많은 사람들이 네가 필요하다고, 널 돌려달라고 나서고 있는 걸 보면 어쩐지 부럽다는 생각도 드는걸. 요즘 같은 세상에 아무나 그런 애원과 응원을 받는 게 아니니까 말야. 비결이 뭐니? 널 아끼는 사람 많은 거 확인했으니까 복직하면 크게 한턱 쏴. 네가 <겨울연가>보다 낫다는 걸 확실히 보여줄 거라 기대할게. 그럼 건강한 얼굴로 그때 다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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