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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종필이와 용필이

지난 총선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건. 시대의 풍운아 김종필 옹께서 충청도의 모처에서 유세를 하실 때의 일이다. 충청 지역의 거두로서 전직 국무총리에 야당총재를 지낸 이 거물이 친히 저 낮은 장바닥으로 임하시자, 민초들은 열광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귀 타고 입성하는 예수에게 “호산나!”를 외치듯이 충청도 백성들, 세단 타고 오신 그분의 존함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조용필! 조용필!”

우리 종필 어른은 그래도 싫은 내색 하나도 안 하더라. 오랜 경륜으로 이게 다 ‘용필이가 노래를 잘하듯이 종필이는 정치 잘하라’는 격려의 민중적 버전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살다살다보니 별게 다 설친다. 듣자 하니 일개 부천시장이 제 이름 기억 못한다고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의 목을 날렸단다. 내 참, 김종필쯤 되는 거물의 이름도 마구 잊어버리는 판에, 보궐시장 이름 따위를 기억해야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근처 도시에 사는 나도 아직 우리 시장님 존함을 모른다. 그런 잡스런 정보에 내 두뇌의 한 귀퉁이라도 귀한 용량 내줄 일은 없잖은가. 그래도 시민 생활에 아무 지장없다. 아니, 시장은 되도록 시민 눈에 안 띄는 게 좋다. 눈에 보이면 짜증나니까. 행사만 있으면 꼭 감사받으러 단상에 올라와 마이크 잡고 썰렁한 얘기로 공연 기다리는 시민들 짜증나게 만드는 분들. 이 참에 반성 좀 해야 한다. 제 돈 내서 하는 행사인가? 내 주민세로 하는 행사지.

이 일을 ‘착한 시장님’ 상을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착한 시장님이라면 개막식이나 폐막식이 아니라 영화제 기간 동안에 제 돈 내고 입장권 사서 저쪽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팝콘 먹으며 조용히 감상하다가 돌아가실 게다. 내가 영화제 다녀봐서 아는데, 거기 오는 사람들 시장님 성함 알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다. 더더군다나 시장님이 앞에 나와 마이크 잡는 건 질색하는 경향이 있다. 시장님들, 이거 아셔야 한다.

조직위원장의 이름을 기억 못했다면, 그건 혹시 조직위원장께서 개폐막식 참석 외에 영화제에서 별 역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그 존함에 워낙 특징이 없거나. 그렇게 이름이 기억되고 싶으면 이름을 색다르게 바꾸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가령 ‘홍’ 자 ‘어’ 자 ‘회’ 자를 쓰든지. 이것도 불안하면 과감하게 ‘홍’ 자 ‘콩’ 자 ‘가’ 자를 쓰든지. 이런 이름이라면, 뽀다구나야 할 식장에서 망령되이 그 이름이 망각되는 불상사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게다.

이번 일은 무식한 개인의 소양의 문제이자, 경직된 관료주의의 비효율성의 문제다. 제 이름 기억 못한다고 성질내는 개인적 한심함도 문제이지만, 시장 개인의 무식함이 졸지에 인사정책이 되어 멀쩡한 영화제 잡아먹는 결과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더 큰 문제다. 시장은 조직위원장에 제 이름이 올랐다고 영화제가 제 것이라 믿나보다. 그런데 그 영화제는 시장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직한 영화인들과 거기에 참여하는 시민들과 거기에 출품한 모든 세계인의 것이다.

이번 일을 권력과 문화, 시장님과 영화제, 한마디로 종필이와 용필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승화시켜야 한다. 판타스틱영화제 8년, 그 사이에 시장은 여러 번 바뀌었다. 시장은 가도 영화제는 남는 것. 총리를 두번 해도 종필이는 잊혀지나, 세월이 가도 용필이의 노래는 지워지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저 유명한 충청도 용필이 사건의 교훈이다. 왜 이리 주제파악을 못할까? 그런 의미에서 일개 부천시장님, 우리 같이 한번 외쳐봐요. “조용필! 조용필!”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