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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술만큼 고마운 핑계는 없다
오정연 2005-02-04

2004년 12월31일 오후 2시경.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쥐고 깨어난 O모 기자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보드카에 오렌지주스를 섞어 홀짝거리면서 점점 기분이 좋아지던 것이 새벽 1시였나, 2시였나…. 알 길이 없다. 새벽 5시쯤 누군가가 그를 현관 안으로 밀어넣었다는 어머니의 제보가 있었지만, 혼란만 더해진다. 생애 최고로 기록될 만한 그날의 숙취는, 200명도 넘는 영화계 종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씨네21> 송년회의 흔적. 조촐한 내부 술자리에서야 별의별 주사들이 예사로 오간다지만, 숱한 손님들 앞에서 정신을 잃은 것은 아무래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실의에 빠진 그를 위로한 것은 연말연시에 걸쳐 휴대폰에 접수된 문자메시지. 송년회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몰라도 매우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음은 분명한 몇몇 영화인들이 보내온 새해 인사였다. 여기서 잠시, 입사 1년을 바라보는 O모 기자의 수습 시절을 살펴보자. 그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비슷비슷한 영화사 언니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헷갈려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어리버리 바쁜 척하는 담당기자를 만나기 위해 몇몇 분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친히 방문해주었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한꺼번에 네댓명씩 만나서 명함을 주고받고 헤어진 그 얼굴들은, 이후에 다른 자리에서 눈인사를 주고받으면서도 정체를 알 길이 없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그런데 정말로 불가사의한 것은 한번이라도 술잔을 기울였던 이들의 이름과 소속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는 사실.

이 오묘한 비밀을 발견한 O모 기자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담당사와 안부전화를 끊으면서, 혹은 인터뷰를 마친 취재원과 헤어지며 “언제 술이라도 한잔”이라는 의미심장한 마무리를 잊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언제 밥이나 같이 먹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도 언젠간 반드시 실현되는 놀라운 의지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일단 술로 엮인 취재원과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은 시간문제. 서로가 비슷한 또래라면 말꼬리가 짧아지고, 이후에는 안부전화를 빙자한 전화 취재가 가능해지고, 나중에는 일없이 만나도 그저 반갑다. 그것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는 기자와 취재원의 삭막한 관계에, 인간미 넘치는 희망의 빛 한줄기가 보이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러니 간밤의 엄청난 추태의 기억을 그저 지워버리고 싶었던 불행한 O모 기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실은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관계자들이 보내온 따뜻한 문자 메시지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놈의 영화판은 술 없으면 되는 일이 없나’ 혹은 ‘기자와 취재원이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같은 일부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저런 수다 끝에 서로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기회를 막을 이유는 없지 않겠나. 그러니까 술이라는 것은 결국, 친해지고 싶은 이들이 편하게 둘러대는 핑계라고, O모 기자는 믿고 있다. 무엇보다 영화를 만들고 소개하는 것이나, 만들어진 영화와 영화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 모두 인간에 대한 애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일 아니던가. 오늘도 은밀한 약속들은 꿋꿋이 오간다. ‘내일 모 배우랑 같이 술먹는 것 잊으면 안 돼’, ‘조만간 모 감독과 술자리 가질 예정인데 관심있으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