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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렇게 자랐다
2001-07-04

김지운 칼럼

오랜만에 <게임>이란 음반 타이틀로 가요계에 컴백한 가수 박진영씨는 요즘 자신의 6집 음반의 노래말로 인해 기독교 윤리실천운동과 YMCA 등 수십개 시민단체들과의 선정성 논쟁에 휩싸였다. 이유는 몇몇 곡의 가사가 청소년들에게 섹스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섹스를 조장한다고? 그래서 나는 시민단체들이 문제시한 몇몇 곡들의 가사를 하나하나 뜯어보려다 금세 흥미를 잃고 그냥 노래를 들었다. 노래로 들었을 때는 전혀 선정적이지 않았지만 시민단체들이 문제시한 가사 하나하나를 눈을 감고 음미해보고 거기에 상상력을 가미하고 진짜 그럴까? 하면서 노래를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요즘 시대에 그 정도 가지고 누가 그 따위 할 일 없는 짓들을 할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아스라히 피어오르는 눈물없이는 듣지 못할 나의 청소년기가 걷잡을 수 없이 떠올랐다. 때는 1980년대 초반이었다. 우리는 멋을 낸 깜장 교복을 입고, 멋을 냈다고 하지만 교복 가지고 얼마나 멋을 냈겠는가? 책가방 옆에 끼고, 옆에 끼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방이 홀쭉했다. 모자는 돌돌 말아 주머니에 끼어넣고, 평상시엔 콧대가 시작하는 부분까지 푹 눌러쓰고 다닌다. 그래서 가끔 머리조심이란 경고문을 못 볼 때가 있다. 폼잡느라고 머리 많이 다쳤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청계천 세운상가를 휘몰아치고 있었고 그곳을 유유히 다니면서 누군가 우리를 불러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 아니나 다를까 <파이란>의 강재씨 같은 삼류 양아치형들이 무릎 나온 코르덴바지에 털실옷을 입고서 팔짱을 낀 채 접근한다. 놀라운 눈썰미다. “뭐 사러 왔어?” 그러면 우리는 갑자기 순진무구한 건전 청소년들의 해맑은 얼굴로 머뭇머뭇,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까맣고 깨끗한 맑은 눈을 깜빡이며 “네?” 하고 되묻는 친구 녀석의 눈동자를 보며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우리의 강재씨는 씨익 웃으며 “따라와” 한다. 세운상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당도한 곳은 아무런 간판도 없이 몇몇 양아치 아저씨와 형들이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낄낄거리거나 잡답을 나누다 인상을 딱 긋고 쓰윽 우릴 한번 올려다보더니 분위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매너있게 맞는다. 우린 이렇게 매너있는 아저씨들이니까 앞으로도 안심하고 종종 놀러와. 이런 암묵적인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릴 데려간 강재씨가 물건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간 사이 우린 양아치 아저씨들과 눈을 서로 안 마주치려고 또는 슬쩍슬쩍, 마주치면 비껴가고 하면서 꽤나 고단한 신경전을 벌였다. 아마 눈에서 줄이 나갔으면 서로 엄청 엉켜 있었을 거다. 이윽고 강재씨가 한권의 책과 한개의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나온다. 테이프엔 그냥 아무 설명도 없이 국군홍보자료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우리가 정말로 긴장하고 정신을 차릴 때가 이때이다. 강재씨가 먼저 선수친다. “너희들 처음 오는 손님이니까 싸게 줄게, 얼마만 내.” 그러면 우린 속으로 “아니 이 아저씨가 장난하나? 선수를 몰라보네” 하면서 “네에∼” 하고 흠짓 놀란다. 누군지 기억은 안 나지만 친구놈들 중에서 “오 마이 갓∼” 하면서 경이적인 탄성을 자아낸다. 결정적인 어시스트다.

우린 미리 값을 결정하고 갔기 때문에 준비한 돈을 손에 꽉 쥐고 돌아서서 의논하는 척한다. 별 내용도 없고 주제도 없는 의논을 지리하게 반복하다보면 뒤쪽의 제일 연장자 양아치 아저씨가 쭈욱 지켜보다가 딱 한마디한다. “줘.” 이렇게 해서 우리는 소위 말하는 빨간책과 포르노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만면에 함박웃음을 띤 채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온다.

그 다음날 빨간책은 전체 반애들이 돌려본다. 물론 끝까지 악의 구렁텅이에 안 빠져드는 초강력 울트라 건전 학우들도 있다. 한두번 선생님한테 걸려서 빨간책을 입에 물고 여선생님이 지나가는 복도에서 손들고 벌을 선 적도 있다. 매번 여선생님이 “그거 뭐니?” 하고 물을 때마다 난처하기도 했다. 비디오테이프는 친한 녀석끼리 돌려본다. 그러다가 유통이 딱 멈출 때가 있다. 매번 한 녀석한테만 가면 유통이 끊긴다. 우린 그렇게 자랐다. 나쁘게 된 놈 한명도 못 봤다. 우린 스스로 자정하면서 자랐다. 그게 건강한 거다.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