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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주인공들 꼭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정체성 찾기·애정관계 변화등 극적 긴장감 높이는 주요장치

<봄날>

‘기억상실’을 극 장치로 활용하는 드라마들이 잇따르고 있다. 에스비에스 <봄날>이 한창 전파를 타고 있고, 한국방송 미니시리즈 <열여덟, 스물아홉>도 곧 방영 예정이다. 기억상실 드라마의 전형적 구도를 확립한 드라마로 평가되는 <겨울연가>도 한국방송 2텔레비전을 통해 재방송되고 있다. 앞서 에스비에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가 두 번의 기억상실 끝에 영원한 사랑을 확인한다는 내용을 다뤘고, <천국의 계단> 또한 여주인공의 기억상실을 극 전개의 주요 모티브로 삼았다.

기억상실은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즐겨 사용되는 소재의 하나다. 최근에만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노트북> <하나와 앨리스> <포가튼> 같은 기억상실을 활용한 영화들이 상영된 바 있다.

기억상실의 극적 활용이 대거 이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요인이 제시될 수 있지만, 역시 기억상실 자체의 극적 매력이 크다는 점이 첫째로 꼽힌다. 극의 긴장감을 높이고 극의 전개방향을 트는데서 기억상실만큼 간편하면서도 효율적인 장치가 드물다는 것이다. 기억상실이 야기하는 극적 긴장감은 크게 두가지다. 주인공의 정체성의 혼돈과 기억상실을 불러온 배경에 집중하는 경우가 하나이고, 기억상실에 따른 애정관계의 변화에 주력하는 경우가 그 둘이다.

한국방송의 한 드라마 피디는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그려지는 첫째 경우는 주로 스릴러나 복수극 등에서 사용되는 방식”이라며 “<본 아이덴티티>에서 잃었던 기억을 풀어가면서 배후의 세력을 밝혀내고 응징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과거 악당이었다가 기억상실 이후 자신이 속했던 악의 체제에 맞서 싸우는 투사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해 나가는 한 남자의 여정을 그린 폴 버호벤 감독의 <토털리콜>이나 역순의 퍼즐 형식으로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는 한 남자의 복수극에 담긴 비밀을 풀어가는 <메멘토> 등도 여기 해당한다. 기억과 감정을 인간과 인조인간을 구별짓는 지표로 삼아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을 담아낸 <블레이드 러너> 같은 일군의 사이버펑크 영화들도 이런 방식의 연장으로 이해된다.

기억상실을 애정의 맥락 안에 배치하는 둘째 방식의 경우는 흔히 멜로의 극적 긴장을 높이고 이야기에 변화를 주기 위해 사용된다. 이 경우도 기억을 잃은 인물의 급격한 정체성의 흔들림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내면의 떨림보다는 주로 그에 따른 이별과 재회 같은 사건의 극적 변화에 더 주목한다.

<겨울연가>

한국 드라마는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두번째 멜로의 방식으로 기억상실을 끌어들인다. 더구나 <겨울연가> 이래 다시 한번 거의 모든 드라마들은 첫 사랑의 영원함을 확인하는 극적 계기로 기억상실을 활용한다. <겨울연가>의 준상(배용준)은 기억을 잃기 전 사랑했던 유진(최지우)을 기억을 잃고 이민형으로 만난 뒤에도 다시 사랑하게 된다. 유진은 이민형에게서 준상을 느끼면서도, 준상과는 다른 정체성을 지닌 민형 또한 민형으로서 사랑했다고 말한다. 기억상실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은 이후 모든 기억상실 드라마에서 되풀이된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현우(지성) 또한 두번의 교통사고를 통해 은수(유진)와 사랑했던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는다.

이 드라마의 조윤영 작가는 “현우는 기억 없이도 은수와의 사랑에 끌리는 운명성을 보여주는 존재로 그려졌다”며 “사랑이란 머리를 초월한 운명적인 것이라는 주제를 그리는 데서 기억상실은 매력적인 장치”라고 말했다. 그는 “운명적 사랑을 얘기하기 위한 장치로는 이복, 근친, 불치병 같은 센 장애들이 활용되는데, 한국은 아직 금기시되는 장치들이 적지 않다”며 “운명적인 사랑이 기억상실로 이별과 갈등을 겪을 때는 시청자의 안타까움 또한 유발할 수 있는 등 기억상실 자체가 드라마적 요소를 풍부하게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기억상실의 원인이 된 교통사고의 배후가 드러나는 과정(<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이나 최면요법 등으로 새로운 기억을 갖게 된 상황(<겨울연가>) 등 배경의 미스테리 또한 극적 몰입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기억상실이 여러 드라마에서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는 것은 문제라는 비판적 시각도 많다. 여러 드라마에서 되풀이되는 비슷한 사례들을 거치며 시청자들 또한 기억상실은 식상한 소재라는 느낌이 강하다. 한 드라마 피디는 “기억상실 자체가 관습화하면서 진부한 클리셰로 자리잡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현실에선 일어나기 힘든 극적 사건의 남발에 따른 개연성의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한국방송의 다른 한 드라마 피디는 “사실 기억상실로 인한 극적 변화는 드라마적인 개연성일 뿐, 현실적인 개연성으로 볼 수는 없다”며 “시청자를 울리면 된다는 인식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김강씨는 “극 중에서 드러나는 기억상실 증세는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지만, 현실에선 극히 드문 사례들”이라며 “<봄날>의 경우 충격적 사고 뒤 일종의 방어작용으로 일어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은 완벽하게 특정시간대의 기억이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고 선택적으로 드문드문 기억이 사라지며, 금방 회복이 된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기억상실의 활용 자체만으로 식상, 진부를 떠올리는 것은 과잉반응이라는 지적도 있다. 기억상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이경희 작가는 “얼마나 극적 개연성을 부여하는가가 열쇠”이라며 “<봄날>은 개인의 어린시절 상처와 커서의 사랑을 기억상실을 계기로 잘 엮어낸 사례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강씨도 “<봄날>은 정신분석적 논리를 비교적 흥미롭게 잘 배치한 듯 하다”고 말했다. <쾌걸춘향> 후속작인 <열여덟, 스물아홉> 제작진도 “잃어버린 사랑의 회복보다는 18살의 눈으로 11년이 지난 29살의 현실을 살아갈 때의 충돌이 빚어내는 재미에 주력할 계획이라 기존 기억상실 드라마와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드라마는 교통사고로 18살 기억으로 퇴행한 29살 주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21세기에 90년대 초반의 감수성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치로서 기억상실을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사랑과 이별의 추억과 아픔이 희미해지면, 또 다른 사랑을 찾아나선다는 점에서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에 관해서는 기억상실을 앓고 사는지도 모른다. 기억상실을 뛰어넘는 운명적 사랑에 대한 드라마의 집착엔 이런 보편적 기억상실 증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판타지가 깔려있을 법하다. 다만 그런 드라마의 상상력이 천편일률적인 틀거리를 벗어나, 다채로운 무늬를 드리울 수 있기를 시청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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