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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의 애버뉴C] 13th street / 늦겨울 그 중국집, 이은주를 떠올리다

갑자기 그 희고 단아한 손이 생각났다. 울컥 눈물이 났다.

뉴욕에 온 이후 얼마간은 한국에 출시되지 않았던 DVD구입하는 재미에 빠졌었는데, 특히 이베이 (ebay)의 흥미진진한 경매과정을 꽤나 즐겼다. 그 와중에 매우 저렴하게 구입에 성공한 타이틀이 있었으니, 바로 오즈 야스지로의 콜렉션이였다. DVD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DVD의 명가’ 크라이테리온(CRITERION- 알찬 부록들로 가득한, 그러나 한가지 흠이 있다면 참 비싸다)에서 제작한 이 DVD에는 오즈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도 수록되어 있었다.

<동경이야기>의 할머니가 어린 손자와 뒷동산을 산책하다가 참 아련하게도 읊조린다. " 네가 크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나? 아마 그때쯤 나는 이 세상에 없겠지..."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외아들>에서는 고생해서 키운 아들을 보러 동경에 간 어머니에게 아들이 묻는다. “실망하지 않으셨어요? 이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죠?” 마치 순간적으로 세월이 흘러 그 때 그 할머니에게 자라난 손자가 답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주인공도 거의 비슷하고 "아 오늘 날씨 좋구나" " 차 드실래요?" 같은 거의 반복적인 대사에 집안의 구조나 숏도 거의 비슷한 오즈의 영화를 연이어 몇 개씩 보고 나면 가끔, 그게 어느 영화에서 나온 장면이었더라? 하고 헷갈리곤 하는데 이 두 장면은 혼동된다기 보다는 뭐랄까, 그냥 오즈가 많은 작품들을 걸쳐서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한 땀에 꾀어진 장면 같았다.

작년 초, 한국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고 나서 한 선배, 단짝친구와 대학로 어느 맥주 집에서 밤이 늦도록 오즈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세월이 지날수록, 나이가 한 살 두 살, 더 들수록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오즈의 영화에 대해, 그의 영화가 왜 이십 대에는 그렇게 깊은 곳을 찌르지 못했는지, 그리고 갈수록 왜 더 묵직해져만 가는지에 대해,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여자애들 둘과 마흔이 오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했지만 그 선을 넘기고도 의연하게 생존해 있는 한 남자가 참 흐뭇하게도, 그리고 진지하게도 이야기했던 날이었다. 그렇게 오즈의 영화는 우리모두에게 죽음이란 존재를, 자꾸만 무서워서 회피하게만 되는 그 두려운 대상을 주전자가 끓고 있는 편안한 다다미 방에 앉혀놓고 잠시 동안 바라보게 만들었다.

몇 달 전인가. 그때 그 선배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그는 “내 감각이 완전히 정지되어 모든 것이 암흑 이전으로 되돌아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게 두렵다"고 "죽음이 진정으로 두렵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디 건강해라. 건강해서 세상을 느끼는 네 감각을 사랑해라. 우린 어쨌든 축복 받아, 폭탄에 맞아 죽지도 않고 페스트에 걸려 죽지도 않고, 굶어 죽지도 않고, 한밤에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맞아 죽지 않고, 그러기는커녕 하룻밤 새에 지구를 돌아 이국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문명의 혜택을, 것의 부작용이 혜택보다 더 커지기 전에, 즐길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인류일 것이다. 또 연락하마.” 라며 죽음 이전에 허락된 지금의 삶을 감사하게 만들었다.

한 두 달 지난 이 편지를 다시 꺼내든 이유는, 서울에서 날아든 갑작스러운 죽음의 소식 때문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 중반의 고개를 넘긴 어린 친구가 그토록 두려운 단계로, 타의가 아니라 자의로, 그것도 이렇게나 일찍 진입해 들어가기까지 그 고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망연자실해졌다. 그녀와는 4년 전 2월, 단 한번 인터뷰에서 만난 것이 고작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음성과 조숙한 태도 때문에 얼핏 차갑고 예민해 보였지만 가끔 깔깔깔, 아이같이 웃는 순간 의외의 따뜻함이 비쳐 나던 소녀였다. 작년에 한겨레신문사 앞의 중국집 주인아저씨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그 중국집에서 였다. 인터뷰를 끝내고 출출해서 함께 밥을 먹으러 갔었다. 그런데 테이블에 앉는 순간 좀 황송해졌다. 가방 하나 자기 손으로 안들게 마련인 유명 여배우가, 자기 먹는 것은 신경도 쓰지도 않고, 내 접시가 비기만하면 음식을 조용히 담아주곤 했다. 젓가락을 쥔 손이 참 희고, 손가락이 참 가늘었다.

오늘, 뉴욕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35가에 있는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돌아왔다. 갑자기 그 희고 단아한 손이 생각났다. 울컥 눈물이 났다. 눈이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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