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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의 애버뉴C] 14th street / 가시는 걸음걸음 케첩을 뿌려 드리오리다

스코시즈, 그에게 오늘 밤은 조용히 케첩을 뿌려주고 싶다.

“아~ 제발 이번 만은… ” 3시간 가까이 TV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감독상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하는 마지막 절정의 순간을 위해서, 3시간의 약간 지루한 전희는 충분히 견딜 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줄리아 로버츠의 입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갑자기 리모콘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쑥 풀렸다. 물론 결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위대함을 폄하하는 것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상을 받은 것에 불만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냥 나는 스코시즈가 이번엔 제발 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은 오랫동안 존경과 사랑을 쏟아왔던 존재에 대한 매우 이기적인 기대였을 뿐이다.

“아 불쌍한 마티..” 물론 ABC의 사려 깊은 PD선생님은 감사하게도 수상발표 후 스코시즈의 반응을 단 한 컷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카데미 감독상 5전 5패’에 빛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예상컨대 그 숲처럼 우거진 검은 눈썹을 실룩거리며 “괜찮아, 괜찮아” 하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겠지. 하지만 누가 알까. 그가 코닥 극장 화장실에서 조용히 눈물을 떨구었는지, 그날 밤 나는 안 되는 놈이야, 하고 집 벽에 머리를 박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어떤 권위를 가진 상이건 간에 상이란 것은 자고로 받으면 기분 좋고 안 받으면 섭섭한 것이 아니던가.

유난히 상복이 많은 사람이 있고 뭘 해도 상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한 때 노래 잘한다(고 착각하)는 어린이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노래 부르기 대회 같은데 나갈 기회가 생겼다. 학교에서 냉정하고 차갑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탤런트 정애리 아줌마를 닮은 음악 선생님의 손을 잡고 어린이 대공원 내에 있는 ‘콩쿠르 대회장’으로 갔다. 노래 부르기 전에 밥을 먹으면 목소리가 잘 안 나온다는 누군가의 말에 하루 종일 쫄쫄 굶었고, 날계란을 먹으라는 누군가의 말에 전날 오바이트가 나올 것 같았지만 꾸욱 참고 그 비린 계란까지 먹었다. 연습도 많이 했고, 감기도 걸리지 않았고, 목도 쉬지 않았으니, 잘 할 꺼 라고, 상을 받으면 찍으려고 사진기도 챙겨 넣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 상도 받지 못했다. 그 흔한 참가상도 없었다. 트로피는 커녕 빈 가슴만 안은 채 터벅터벅 대공원 계단을 내려오는데, 영화 같으면 어깨를 다독여줘야 마땅할 그 선생님은 역시 냉정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혹시 선생님이 화가 나신 게 아닌가 눈치까지 볼 정도였으니 참 서러운 ‘시츄에이션’ 이었던 게다. 결국 우리 둘을 아무 말 없이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나는 원래 잘 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어린이였지만 그 순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참새처럼 조잘거리던 입에 굳은 자물쇠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저주 받은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세상에 내고 싶지 않았다. 이 따위 바보 같은 경쟁에는 다시는 나오지 않겠노라고,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야 정상인 어린이의 심장이 늙은 마귀할멈의 저주에 찬 말로 채워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집이 있는 남포동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선생님이 물었다. “배고프냐?” 해는 어느덧 뉘엇뉘엇 지고 있었고, 그러 고보니 배도 고팠다. 우리는 남포동 극장골목을 마주하고 쭉 문을 연 한 양분식 집에 갔고 선생님은 나에게 오무라이스를 사주셨다. 토마토 케첩을 뿌리려는데 입구가 말라버린 케첩은 뿌웅뿌웅 마른 방귀만을 껴댔다. 세차게 흔들고 또 흔들었지만 여전히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아, 얘까지 나를 이렇게 안도와 주나. 순간 갑자기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으억 으억 으억, 오무라이스를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다. 선생님은 다른 테이블에서 새 케첩을 들고 와서 조용히 내 오무라이스 위에 뿌려주셨다. “ 야, 괜찮다, 상금도 없는데” 이 여자 진짜 이상하다. 그게 어린이에게 할 소리냐. 하지만 밥을 먹으니 배도 불렀고 이내 기분도 좋아졌다. 물론 그 이후로 한 2,3일 동안 우울했던 것 같지만, 곧 나는 상 따위는 깡그리 잊고 살아가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여전히 개근상을 제외하고는 별다르게 상을 받은 기억은 없다. 행운이나 운 같은 게 일없이 찾아오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이 살았다. 그래도 가끔은 서재 가득히 자랑스럽게 세워놓을 트로피 같은 게 있는 삶이었다면, 좀 더 눈치 안보는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나저나 아카데미 시상식은 결과 때문이 아니라, 지난달 열린 골든글로브 보다 재미가 없었다. 마치 리허설을 봐버린 연극 같았다. 후보작과 후보자들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인지, 보다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수상자들의 소감도 그리 극적이지 않았다. 한달 전 처음으로 상을 타던 그들은 모두 들떠 있었고 모두들 충분히 감상적이었다. 제이미 폭스가 무대 위에서 “예~에” 하면 관객에서 “예~에” 노래를 따라 하던 ‘레이 찰스 놀이’도 두번 쯤 하니 이제는 재미가 없었다. 사회자로 나선 크리스 록의 농담은 어쩔 땐 시원시원했지만 동료들에 대해 던지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농담은 가끔 수위를 넘어서 아슬아슬함 마저 안겨주었다. (물론 숀 펜의 따끔한 지적이 이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아카데미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미스터 오스카’ 가 그의 서재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건 말건 간에 마틴 스코시즈는 여전히 우리시대 위대한 감독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에겐 “이 상은 당신 거예요, 마티” 라고 말하던 오랜 친구 델마 순메이커가 있고, 제이미 폭스에게는 수상발표가 나기 전 “상을 받지 않아도 아빠는 지금 그대로 최고로 멋있어요” 라고 말해주는 딸이 있고, 이스트우드에겐 일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아이인” 아들이 감독상을 받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머니가 있다. 누구는 상 받은 인생을 살고 누구는 상 못 받는 인생을 산다. 쓰라리고 속상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세엔 별로 지장이 없다. 스코시즈, 그에게 오늘 밤은 조용히 케첩을 뿌려주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요, 마티, 상금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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