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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의 애버뉴C] 16th street / 기품 있는 마리아들

영화 <기품있는 마리아>를 현실에서 발견하다

“숨만 쉬어도 한 달에 2백 만원은 들 걸?”

가진 것 하나 없는 주제에 뉴욕에 가겠다고 했을 때, 왕년에 한번쯤 맨하탄에서 살았다는 사람들은 저 애가 제정신인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사실 뉴욕은 비싼 도시다. 뉴요커들 대화의 대부분이 비싼 렌트비란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맨하탄에서 등을 붙이고 잘 침실, 라면 하나라도 끓여먹을 부엌을 가지는 것은 상상 이상의 돈이 든다. 물론 예전 이 칼럼에서 썼듯이 나에겐 내일을 위한 돈 같은 건 없었다. 몇몇 잡지에 글을 쓰는 것으로는 렌트비는 커녕 쉬지 않고 봐대는 영화티켓 값도 벌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일할 곳을 찾아보게 되었고, 다행히도 이 가난한 중생을 거둬주실 소호의 네일가게 사장님을 소개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J.F.K.공항에 떨어진 첫날부터 손톱파일과 큐티클 니퍼를 들고 맨하탄의 넘쳐나는 불법노동자 대열 속으로 들어갔다. (아! 부디 이민국이나 대사관에서 이 글을 보지 않기를!)

봄이 오는 냄새가 확연히 느껴지는 3월, 어느덧 몇 개의 계절도 지나고 세월도 흘렀다. 손님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생초보’에서 이제 매니큐어도 패디큐어도 빠른 시간에 ‘뽑아’ 낼 수 있는 중급 기술자가 되었고, 어색하고 부담스럽기만 하던 소호도 이제 길에서 단골손님들과 마주쳐 수다를 떠는 편안한 ‘우리동네’ 가 되었다. 언젠가 이곳에서의 ‘불법노동자의 삶’을 내 개인웹사이트에 행복하게 쓴 적이 있었는데, 한 모르는 방문객이 ‘당신이 그곳에서의 삶을 즐기듯 표현하는 것이 보기에 좀 역겹다’ 는 식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또 가끔 한국에서 ‘기자씩이나’ 하던 사람이 이곳에서 ‘겨우 네일 샵’ 에서나 일하는 것을 ‘재수없는 낭만’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심장에 손을 얹고 솔직히 말해, 1/10정도는 이것이 영구적인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불평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하루의 노동이 없으면 나는 이곳에서의 삶을 지탱할 수 없다. 손님들이 주는 몇 달러의 팁이 내가 영화를 볼, DVD를 구입 할, 빵을 살 돈을 제공한다면 나는 내 노동이 부끄럽거나 구차하지 않다.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닌 이상, 세상의 모든 노동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신성하고 이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지사 하는 일이라면 나는 그것을 즐기고 싶다.

네일 가게에서 일하는 가장 즐거움 중 하나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한국 분이 사장님이지만 이곳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통상 ‘스패니쉬’ 라고 불리는 남미 계 불법 이민자들이다. 나보다 어린 나이지만 벌써 장성한 아들이 있는 에쿠아도르 여인 ‘올가’도, 똑똑하고 재밌는 친구지만 남편 복은 지지리도 없어서 가끔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출근하곤 하는 ‘애나’ 도, 영어는 약해도 ‘팁 발’은 누구보다 강해 저녁이면 두둑한 돈 뭉치를 챙겨가는 페루에서 온 ‘리마’도 저마다 트로트 가사로 만들면 앞 뒤 트랙을 빼곡히 채울 수 있을 만큼, 구비구비 사연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 다들 뉴욕으로 흘러 들어온 지 꽤 되었고, 물론 그녀들의 관광비자가 만료 된지도 오래되었다. 이 나라의 공식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선, 아들, 딸이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리거나,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과 재혼하는 수 밖에 없다. 이런 친구들은 네온이 반짝이는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도 만날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을 만나지 않았던들 우연히 보게 된 이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이 그렇게 가깝게 다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오른 배우들 중에 가장 신선하고, 새로운 인물이 '있다면' 단연 (Maria full of Grace)의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였을 것이다. 데뷔 초기 S.E.S.의 유진을 닮은 듯한 이 소녀가 연기하는 ‘마리아’는 남미 콜럼비아의 한 어린 여공이다. 어느 날 마리아는 일하던 공장에서 쫓겨 나고, 책임감 없는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하고, 자신을 돈 버는 기계 정도로만 생각하는 가족들을 떠나 뉴욕 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이 가진 것 없는 소녀의 뉴욕 행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돈을 벌기 위해 마약운반의 ‘노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작은 고무주머니에 마약을 담아 그것을 목구멍으로 삼켜 위로 운반하는 일. 물론 처음엔 그저 쉽게 돈을 버는 일 정도로 생각했지만 이내 마리아는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콜럼비아의 작은 마을과는 비교도 안될 뉴욕의 한 복판. 그곳에서 마리아는 마약이 위에서 터져 처참히 살해되는 한 친구의 허망한 죽음을 보고, 동정 없이 가혹한 세상을 경험한다.

그러나 한바탕의 소동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간 마리아는 결국 친구만을 떠나 보내고 홀로 남는다. 그리고 돌아서서 다시 그 지옥 같은 도시를 향해 걸어간다. 아마도 이제 저 소녀의 앞 길엔 더 험난한 일들이 펼쳐질 것이다. 그녀의 아기에게도 이 나라는 그리 쉽지 않은 땅일 것이다. 하지만 배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의 초음파사진을 굳게 쥔 저 소녀의 발걸음은 안전한 무덤이 아니라 치열한 삶을 향해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다음날 출근 했을 땐, 왠지 매주 보던 그 얼굴들이 다르게 보였다. 그들이 살아온 몇 년의 삶 속에 내가 상상도 못할 드라마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저 치열한 생존자들이 존경스러워 졌다. 꽃샘추위 때문에 손님이 없어 한산했던 어느 날, 우리들은 늘 그렇듯이 모여 앉아 매니큐어 뚜껑을 닦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올해 말이면 이 곳을 떠날 거야, 라고 이야기 했다. 유난히 언니처럼 따르고 친하게 지내는 애나의 눈에 잠시 눈물이 스쳤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여전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견디는 법을 배운 ‘어른이 된 마리아’는 이내 눈물을 거둘 줄도 알았다. 기품 있는 마리아들!. 내가 팁은 나눠 줄 수 없어도, 가끔 퇴근하기 전에 예쁜 ‘프렌치 매니큐어’는 해줄께요. 블랑카네 사장님은 나빠도, 우리 사장님은 안 나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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