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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칼럼] <토지>,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거야”

서희와 길상의 약한 면이 새롭게 보인다 - 사진제공 SBS

80년대 말에 방영된 <토지>를 즐겨 봤던 시청자라면, 어린 서희가 바들바들 몸을 떨며 말했던 유명한 대사,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거야”를 기억할 것이다. 반 아이들과 그 대사를 흉내내며 깔깔대던 기억도 있는 걸 보면 당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대사인 듯하다.

가장 인상적 장면은 서희와 봉순이 다시 만나던 때

그래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거야” 보다는 서희와 봉순이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던 장면을 꼽겠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봉순은 서희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눈물까지 흘리지만 서희는 길상과 결혼한 자신을 봉순이 어찌 생각할까 염려하며 안절부절 못해 하는 장면이었다. 어린 나이에 서희의 속내까지 이해했을 리는 만무하나, 봉순에게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서희의 모습에 나도 조금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헌데 착한 우리 언니, 내 옆에서 서희 못됐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거라. 봉순은 서희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고서도 저리 기뻐하는데 서희는 자기 체면이나 생각한다며, 저런 못된 여자가 다 있냐고 손가락질을 했었다. 서희 이겨라, 서희 잘한다, 나와 함께 줄곧 서희 편을 들어왔던 언니의 낯선 모습에 괜히 놀라고 뜨끔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서희 편인 나는 못된 아이인가, 하는 뜨끔한 기분.

2005년, <토지>가 다시 방영되면서, 나는 추억 속의 그 장면을 새롭게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다시 봐도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니 나는 어쩔 수 없는 못된 아이인가. 그러나 지금 내가 서희에게 갖는 감정은 무조건적인 지지라기보다는 오히려 연민에 가깝다.

이제는 연민이 새롭게 보인다

연민, 내가 <토지>를 다시 보며 느끼는 새로운 감정이다. ‘서희는 똑똑하고 당찬 여자다, ‘열 양반 안 부러운 머슴’을 선택할 정도로 현명한 여자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그런 줄만 알았다. 그때는 서희가 길상을 선택하며 품었을 갈등은 상상도 못했다.

다시 보니 서희는 외로운 여자였다. 훌륭한 줄만 알았던 길상도 평범한 남자에 불과했고, 서희와 마찬가지로 외로운 남편이었다. 한때 아내의 머슴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길상에게 지울 수 없는 콤플렉스로 남아 그 자신과 아내를 괴롭힌다. “저와 아이들을 보호해주셔야지요”라는 아내의 말에 길상은 “평생 종으로 남아달라는 말이냐”고 답하는데, 그 말은 거칠게 표현하자면 ‘내가 네 종이냐’는 뜻이다. 그야말로 못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훌륭한 청년 길상조차 머슴 콤플렉스를 어찌할 수 없고, 당당한 서희조차 남편의 신분이 어쩐지 부끄럽다.

어릴 때는 보지 못했던 서희와 길상의 약한 면을 보면서, 저 둘의 이야기만으로도 상당한 분량의 드라마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의 묘미를 살려야 한다는 부담, 그리고 최수지가 주연했던 80년대 <토지>에 대한 부담을 벗는다면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21세기 <토지>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심은하의 “당신, 부셔버릴 거야”를 기억하는 시청자에게 2005년의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거야”는 예전만큼의 충격을 주지 못했고, 김현주의 얼굴에서 최수지의 닮은 면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다.

파격적인 21세기형 각색이 아쉽다

전혀 다른 시도를 해봐도 좋지 않았을까? 길상 캐릭터만 해도 ‘머슴’에 대한 선입견을 벗고 좀더 잘생긴 배우를 캐스팅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유준상이 잘생기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공주처럼 도도한 최서희가 자존심을 버리고 선택한 남자라면 분명 범상치 않은 매력을 가졌을 터. 충성스럽고 듬직한 이미지도 좋지만 최서희가 끌릴 만큼 매력적인 남자의 이미지를 구현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현대의 도도하고 당찬 여성들의 이상형, 즉 ‘이상적인 머슴상’을 길상 캐릭터를 통해 새롭게 창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토지>를 보면서 드는 이런저런 생각, 새로운 감정들, 그것은 <토지>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어도 좋았을 텐데 주연 배우만 바뀌었을 뿐, <토지>는 늘 그대로다. 아쉽다.

사실 <토지>를 두고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꽤 부담되는 일이다. 원작소설의 명성이 워낙 어마어마한데다 드라마의 여정이나 주제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과감하게 각색해보지 그랬냐는 나의 아쉬움은, 원작소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드라마 <토지>에 대한 애정 때문이기도 하다. 정작 전혀 다른 <토지>가 나올 때쯤이면 나도 늙어서 옛날 <토지>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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